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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시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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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9-14 20:28 조회4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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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풍성한 꽃다발과 꼼꼼하게 인덱스를 붙힌 책을 들고 있었다. 내 책을 읽은 그녀가 기회가 되면 보고 싶다고 연락했을 때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아직 '작가'라는 호칭이 매우 쑥스럽고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자연스럽게 굴어야 정말 작가가 될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을 숨겨 두고 그녀를 맞았다.


무명인의 책을 사고 시간 내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시간과 정성을 내어주기엔 너무도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책’ 아닌가. 책이란 취향, 관심사, 문장, 표지가 주는 느낌까지 독자에게 선택받아야 하고, 그 마음에 꼭 들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촘촘히 적은 나의 문장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동향’의 끌림에서였을 것이다. 꿈 꾸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살았던 여덟 해는 떨어졌던 엄마를 다시 만난 어린아이처럼 모국의 정을 쭉쭉 빨아 먹었다. 어른이 되어 돌아온 모국은 내게 내내 친절하고 다정했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며 내 입에서 나오는 한국말을 대견해했다. 그들과 나눈 반짝이는 시간과 모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글로 남겼고 그 글을 묶어 한국을 떠나며 책으로 만들었다. 길 위에서,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적었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한국 곳곳의 동네서점에 입고 요청 메일을 보낸 후, 독자를 기다리는 기특한 책 사진을 보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 온라인에서 내 책을 읽었다는 독자 후기를 만났다. 한국 독자에게는 애정과 인정을 받고 싶었다면, 캐나다 1세대와 1.5세대 독자에게는 공감받고 싶었다. 밴쿠버에 있는 한인 서점에도 책을 수줍게 전하고 독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를 '한 권이나' 읽은 그녀는 내 마음이 향한 곳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마음과 문장이 만난 지점을 가리키며, 내게 답장하듯 그의 인생도 전해 주었다. 닿을 길 없는 우리가 문장으로 만났고 곁에서 서로에게 귀 기울인 시간이었다.


토론토와 밴쿠버 한인들이 참여하는 북클럽 모임에서도 내 책을 선정해 주셨다. 1세와 1.5세대 독자를 만날 기회였다. 캐나다에서도 세 시간 시차가 나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온라인 북클럽에서 '작가와의 만남'은 두 시간이 진행되었다. 쓰는 사람으로의 여정을 묻는 다양한 질문과 다정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책 구석구석을 공감한 독자들이 밑줄그은 문장을 그들의 목소리로 다시 읽을 때 내 글은 반짝거렸다. 나의 문장에서 그들의 문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타인에게 받을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애정을 다 받은 것 마냥 달콤했다. 이러려고 책 쓴 거였다. 내 안에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고, 그것이 당신의 것이기도 했다는 이어진 공감으로 가득 차고 싶어서.


독자를 직접 만난 황홀한 경험이었다. 책을 써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시간이지만, 책을 썼다고 해도 쉽게 주어지지 않을 시간. 온라인 모임 이후에 내 책을 선정했던 북클럽 리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가 쓰는 사람으로 가는 길에 오늘 시간이 도움 되었길 바란다는 격려의 말이었다. 독자를 만났던 시간이 무명의 쓰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 였는지, 다정했던 이 시간이 그에게 어떤 꿈을 꾸게 했는지 다 전하지 못했다. 내 글이 초라해 길을 잃을 때마다 이 시간을 꺼내 보며 나는 또 다른 여덟 해를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자문해 보았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빌리자면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개인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어딘가에 그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하는 행위이리라.

그렇다, 내 글 쓰기가 결국 당신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면 좋겠다. 모국어로 적어 내려간 나의 사소한 사정이 당신의 것과도 연결되어 있을테니까."_ '당신의 사소한 사정’ <나의 사적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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