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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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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9-14 22:08 조회4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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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215437_JAQwdNv9_98958200415256ac1a658f3ffcb81584da8808ca.jpg              박지향



이제 막 눈 뜨기 시작한 벚꽃나무 가지 너머로 서쪽하늘이 붉게 저물면, 어슬렁대던 들짐승도 헤매돌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입니다. 모두가 바쁜 걸음으로 둥지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 둥지였던 곳을 찾아 나도 길을 나섭니다. 많은 것을 꿈꾸었고 많은 것이 가능했던 그곳, 그곳에 가면 그리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이 저녁 길을 나섭니다. 


호수를 품은 도시 일산의 후곡마을 5단지...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햇살 아래 환하게 빛나던 꽃수레가 있었습니다. 빨강 하양 노랑 분홍, 갖가지 색깔의 장미 꽃단이 산처럼 쌓인 수레 한 귀퉁이에 노오란 프리지어를 숨겨 파시던 할아버지의 꽃수레.... 수북이 쌓인 향기로운 장미를 두고 우리는 언제나 노란 프리지어를 선택했습니다. 혹여 먼저 온 사람에게 프리지어가 팔려갈까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숨겨놓고 파시던 할아버지, 아직도 거기서 꽃을 팔고 계실까요? 먼저 도착한 꽃수레 앞에서 얼굴 가득 봄햇살을 받으며 봄꽃보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말없이 장미꽃 가시를 손질하시던 할아버지와 프리지어처럼 미소 짓던 선생님을 만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2003년 늦은 봄이었습니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타국에서의 삶은 각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더군요. 지혜로운 분이시니 잘 이겨내시리라 믿어요" 하시며 노란 프리지어 한단과 두 권의 책을 안겨주셨지요. 주신 프리지어는 제가 한국을 떠나올 때까지 거실벽 한쪽에 걸어두고 "곧 다시 올게요"를 약속했습니다. 떠나기 전 오십여 권의 책들은 이삿짐 속에 미리 실어 보내고 선생님께서 주신 책 두 권"좀머 씨 이야기"와 "콘트라베이스"는 백팩에 넣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독일 유학시절에 만나셨다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이죠.  다른 책들은 다 빌려주어도 소중했던 선생님과의 추억에 흠집이 날까 누구에게도 빌려줄 수 없던 쥐스킨트의 책, 지금도 선생님이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고 쓰다듬고 냄새를 맡아보곤 합니다. 나만이 맡을 수 있는 프리지어향 물씬 풍겨오는 책을요.


모두가 좋아하는 향은 아니지만 한번 맡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프리지어 향처럼 잊을 수 없는 분, 한지우 선생님! 쉽게 드러내지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도 않는, 묵직하고 깊은 콘트라베이스의 선율 같은 선생님! 세월을 뛰어넘고 바다를 건너도 바래지 않는 선생님과의 인연은 프리지어 향기로, 콘트라베이스 선율로 기억 속에 저장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만나 좋은 친구로 인생의 선배로 제 삶에 귀를 기울여 주신 선생님!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내 말 안 들리냐고 상대방의 청력을 탓하는 세상에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말을 듣던 귀한 인연을 이제야 찾아 나선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민지의 삶은 차안대를 하고 달리는 경주마(競走馬)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가혹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눈가리개를 하고 경주마처럼 트랙을 달리는 동안 선생님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2011년 작은 아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렵게 다시 찾은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저의 무심함으로 또다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작은 아이 편에 보내주신 정성스러운 편지와 선물을 꺼내 보며 수없이 "언젠가"를 되뇌면서도 연락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바닥을 기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은 알량한 자존심은 눈이 아닌 마음을 가려버린 거지요. 마음을 가렸던 차안대가 흘러내리면서 또박또박 써 보내신 선생님의 마음이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모스부호처럼 깜빡이기에 늦었지만 용기를 내어 봅니다. 수필의 성서가 된 피천득 선생님의 글, 인연에서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지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고, 일생을 못 잊을 것 같은 선생님을 더 늦기 전에 찾아야겠습니다.  


쥐스킨트는 오케스트라 속에 묻히면 소리를 내는지 안 내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 없는 악기지만 연주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악기 콘트라베이스를 내세워 인간세상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누구나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서 있어야 할 위치가 있고 , 또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왜 그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되었고, 그가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따위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겁니다."라고 하던 콘트라베이시스트의 욕망과 사랑, 좌절과 외침은 나의 외침 이기도 했습니다. 콘트라베이스가 잡아주지 않으면 다른 악기들의 소리는 무게를 읽고 허공에 떠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지휘자는 없어도 콘트라베이스가 없으면 안 된다는 중요한 악기인데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 한번 받은 적 없지요. 내 소리를 들어본 사람도 드물고 내 소리를 들어보려 애쓰는 사람도 드물지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의 삶이 그러하고 헛기침으로 걱정을 대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러하고 코로나가 만연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손길들이 그러합니다. 쥐스킨트는 속삭입니다. 맨 뒷줄에 서서 온 힘을 다해 현을 긁고 튕겨도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너 일지라도 너로 인해 빛나는 오케스트라와 가수의 노래가 있다고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묵묵히 해내는 자들을 향해 '너도 그렇다'며 등을 토닥입니다.


쥐스킨트처럼 내 등을 토닥여 주셨고 환한 프리지어처럼 은은한 미소로 저를 응원하고 염려해 주신 여유롭고 우아하셨던 한지우 선생님!  지금 출발하면 내일 아침엔 그곳에 도착하겠지요. 혹, 할아버지의 꽃수레를 만난다면 실어오신 장미는 수레채 모두 사겠습니다. 우리의 인연에 향기를 입혀주신 할아버지의 고단한 다리는 쉬게 해 드리고 산처럼 쌓인 장미와 프리지어는 선생님 발아래 깔아드리겠습니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시간을 읽고도 남을 우리 침묵의 대화 속에 노란 프리지어, 향기를 더해 주겠지요. 만나지 못해도 잊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하는 콘트라베이스 선율처럼 언제나 제 등 뒤에 서 계신 선생님을 더 늦기 전에 꼭 만나뵙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2022년 2월 28일 밴쿠버에서 박지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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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편지를 읽으신다면 밴쿠버 중앙일보사에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얼른 연락드리겠습니다. 꼭 이 편지가 선생님께 가 닿기를 기도 합니다.


밴쿠버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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