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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보배아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0-11 09:28 조회45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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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배아이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회원 



그리운 친구와 이십 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인 목소리를 들어 반갑고 좋았다. 서로의 인생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결혼은 했느냐, 아기가 몇 명이냐 물었다. 나는 “애가 넷이다”라고 했고, 친구는 없다고 했다. 결혼은 했지만 남편과 의논했단다. 아이를 낳지 말자고. 별안간 연락된 그리웠던 친구와 짧은 통화를 끝내면서 내 인생에서 새끼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이를 낳는 것을 필연적으로 생각했다. 29살의 결혼이었기에 하루라도 나이가 어릴 때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 나는 당연히 아이를 낳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안 낳고를 선택할 수 있는 문제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새끼를 낳지 않는 인생을 생각해 보질 않았다. 너무도 마땅히 받아들인 종족 본능의 의무를 기껍게 여기셨는지 신은 나에게 네 명의 생명을 맡겨주셨다.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기로 최대한 많은 것을 준비했다. 출산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준비했다. 태교를 위해 클래식 음악 듣기도 했다. 하늘이 주신 생명이라는 뜻에서 따온 ‘하늘이’라는 태명도 지어주고 녀석과 알콩달콩 대화도 밤마다. 임신 6개월쯤엔 흰 면티를 오려서 배냇저고리를 지었다. 소천문을 가릴 신생아 모자도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임신을 확인하는 붉은 두 줄을 발견한 이후 배가 불러오는 약 5개월이 될 때까지 넉 달 가까이 여자의 몸은 온 힘으로 격변기를 경험한다. 바로 음식 냄새에 미치도록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 이 입덧이야말로 임신기간의 가장 호된 훈련이랄 수 있다.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혹독하게 통과해야 해야 한다. 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한 나는 나의 임신으로 인해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일거리가 넘어가서 피해를 줄까 봐 겨울방학 때 출산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최대한 표시 안 나도록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입덧을 들키고 말았다. 한 번은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 버스에서 ‘명동 칼국수’ 간판을 보자마자 내렸다. 갑자기 당겨서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했다. 한 번은 녹두죽이 먹고 싶어서 남편에게 사 오게 했다. 그런데 힘들게 사온 녹두죽의 연푸른 색깔을 보자마자 당장 치우라고 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비위가 상해서 못 먹었다. 한동안은 냉장고 문도 못 열었다. 참크래커와 오렌지 주스를 주식으로 겨우 버텼다. 그런데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입덧이 더 심했다. 둘째는 캐나다에 이민이라는 큰 변화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물설은 곳에서의 임신이었기에 더 힘들었다. 한국음식을 구하기 어렵기도 했거니와 무엇을 먹어도 고스란히 게워 내고 물마저도 뱃속까지 내려가지 못했다. 하도 먹지를 못해서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기운이 없어 고개를 드는 것도 힘들었다. 일상생활은 포기하고 화장실 변기 옆에서 아예 엎드려 지냈다. 장장 넉 달을 기어다니고 응급실에 가서 포도당 수액을 맞으면서 버텼다. 하도 요란한 입덧이길래 쌍둥이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토록 나를 죽일 둥 말둥 한 둘째는 쌍둥이가 아닌 여자아이였다. 재밌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남자아기를 가졌을 때는 입덧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네 번의 출산은 어쩌면 내가 남편을 만나기 전에, 아직 어른이 되기 전 한참 전에,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미래에 대한 그림 중 하나였다. 아이를 넷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에게 남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6살 나이 차이로 동생과 많이 놀지 못해 외로웠나 보다. 어린 시절 보았던 ‘작은 아씨들’이라는 영화 속에 차분하고 듬직한 큰 언니와 천방지축의 재미난 둘째, 사랑스러운 셋째와 귀여운 막내, 그렇게 네 자매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던 것 같다. 올림픽 때 개회식을 보면 커다란 오륜기를 4명의 선수가 각각 네 모서리를 붙들고, 씩씩하게 행진하지 않은가. 4명은 그렇게 나에겐 완벽한 숫자였고, 커다란 산도 짊어질 수 있는 다부진 네 개의 기둥과 같았다.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갔다 온 얘기를 하고, 여자들은 애 낳은 얘기를 한다고 하는데 나의 애 낳은 이야기는 남들의 네 배는 된다. 한 녀석 한 녀석이 다 다르고, 별나다. 첫아기의 태동을 느꼈을 때를, 녀석이 발로 손으로 내 몸 안에서 툭툭 나를 건드렸던 순간을 뭐라고 형언하기 어렵다. 한 인간의 몸 안에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나는 십 년 동안 네 번 아기를 낳았다. 여자아기를 가졌을 때는 배가 둥그스름하게 넓게 퍼졌고, 남자아기는 배 모양이 볼록 뾰족하게 앞으로 봉긋해졌다. 첫아기를 낳고 주먹만 한 신생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기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엄마는 ‘네 알맹이가 그렇게 예쁘냐?”라고 놀리셨다. 엄마의 날 것 같은 표현,  ‘알맹이’가 바로 내 새끼였다. 새끼가 알맹이가 되고 나는 껍데기가 된다 해도 좋았다. 내 몸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경이로웠다. 아이를 키우고 두번째 임신을 했을 때, 과연 그 과정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점점 더 나는 어미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살배기 아이를 옆에 세워 놓고 다시 신생아를 품에 안았다. 하나였을 때와는 또 전혀 다른 기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아니었다. 딱 세상을 모두 가진 기분이었다. 두 녀석이 한 침대에 누워 자는 모습은 천국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만 삼 년쯤 지나서, 이제는 두 아이를 곁에 세워두고, 갓난아이를 품에 안았고 내 기분은 이랬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선배님 쯤 되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낳는 선수가 되었다는 느낌!? 게다가 이번엔 남자아이였다. 입덧도 하나 없이 잘 먹고, 잘 자게 임신기간을 허락해 준 순둥이였다. 


셋째를 어엿한 유치원생으로 키워놓고 이 몸은 슬슬 사회에 복귀할 생각으로 설레던 중이었다. 그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또다시 임신, 처음엔 놀라서 차마 남편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머리도 지끈거렸다(맞다, 그 옛날에 네 아이를 낳겠다던 그 포부는 잊고 있었다.) 사실 기쁨보다는 다시 그 모든 과정을 다시 해야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내 나이 마흔둘에 다시 출산을 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과 친지도 없이 캐나다 땅에서 출산과 육아로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그 시간을 경험하고자 집에서 출산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무나 집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초산이 아니었고, 이미 세 번의 분만 경험이 있었고, 게다가 모두 자연분만을 했기 때문이었다. 두 명의 숙련된 조산사와 훈련 중인 조산사 세 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이미 양수가 터진 이후였다. 세 명의 조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아기가 더 밑으로 내려오도록 거실을 어슬렁거렸다. 조산사 한 명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진통할 때마다 뒤에서 허리를 만져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진통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남편도 이리저리 다니며 노심초사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이윽고 결전의 순간이 닥쳐왔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미리 따뜻한 물로 채워놓은 욕조 안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큰 딸아이에게 카메라를 맡겨놓았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잘 기록해달라고. 나중에 보니 몇 장은 흔들렸지만, 꽤 괜찮은 우리 가족사의 기록사진으로 남았다. 따뜻한 욕조 안에서 진통이 멈춘 사이사이에 조산사와 몇 마디를 나누었다. 몇 번의 마지막 진통이 지나고 마침내 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냥 알았다. 힘을 줘야 함을. 그리고 아아… 녀석이 어미의 몸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작고 오동통한 핏덩이가 드디어 내 안에서 가슴 위로 옮겨졌다. 여전히 엄마의 몸과 탯줄로 연결된 채로! 한동안 나는 보드라운 아기의 맨 살을 쓰다듬었다. 아기를 키웠던 탯줄을 만져보았다. 열 달 동안 영양과 사랑을 전달한 튼튼한 조직이었다. 나는 조금 더 그 순간을 누리고 싶었지만 핑그르르 돌았다. 조산사들도 출혈이 심해지면 위험해진다면서 탯줄을 자르고 물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욕실로 들어와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힘을 주고 용을 쓰니 태반이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기를 키운 고귀하고 위대한 어미 몸의 일부였다. 수많은 실핏줄로 얽히고 설킨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게 생긴 아기집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사를 드렸다.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내가 한 것은 정말 작은 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생명의 시작으로부터 열 달에 걸쳐 세포분열을 하고, 심장이 생기고, 콩팥이 생기고, 눈과 코와 입이 생기는 과정에서 내 힘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섬세한 혈관과 힘줄로 견고한 인큐베이터였던 아기집을 보는데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침대로 옮기고, 조산사가 찢어진 부위를 꿰맸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새끼에게 젖을 물려보았다. 이미 세 번의 모유 수유를 했던 능숙한 손놀림으로 새끼의 입 안으로 어미의 젖꼭지를 쑥 밀어 넣었다. 본능적으로 어미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이제 됐다. ‘오늘부터 1일이다. 꼬맹아!’ 


네 번의 출산 경험은 언제나 뒤돌아보아도 생생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유축기를 등에 짊어지고 직장과 집을 오가면서, 하루에 두 번씩 직장의 꼭대기층 화장실 맨 끝 칸에서 젖을 짰다. 그 젖을 다음날 어미가 일하러 가 없는 시간에 친정엄마가 아기에게 먹였다. 일하는 중에는 보고 싶었고, 집으로 달려가서 아기를 안으면 너무 행복했다. 아기를 목욕시키고, 재우고, 어르고 안아주고, 먹이고… 친정엄마와 셋이서 인형놀이 하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도 첫 손주라 이뻐서 몸이 닳게 물고 빨았다.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돌 때 입힐 돌 한복을 손바느질했다. 한복감과 마름질할 수 있는 옷본을 보내주는 꾸러미를 주문해서 아기가 잠들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옷을 지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이들이 아팠을 때 어미의 심정을 가장 많이 이해했던 것 같다.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감사히도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건강했다. 가끔 감기에 걸렸을 때, 밤새 열을 내리려 홀딱 벗겨서 젖은 수건으로 온몸을 문지르고 울면 달래고, 때론 가슴 위에 올려놓고 졸음을 쫓았다. 첫째와 셋째가 신생아였을 때 황달이 심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조막만한 발뒤꿈치에서 피를 뽑아 검사를 했다. 황달수치가 좋아지질 않아서 결국엔 아동 전문병원까지 갔다. 지금 돌아보니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발을 동동 굴렀다. 환절기가 되면 한 녀석씩 감기에 걸린다. 그럼 그 녀석이 나을 때쯤 다른 한 녀석이 콜록대기 시작하고, 어떨 땐 두 녀석이, 어떨 땐 세 녀석이 기침을 해댔다. 그럴 때면 약을 안 먹겠다는 애들을 제압해서 억지로 입안에 약을 부어 넣기도 했다. 그러다가 엄마 생각을 했다. 나야말로 어렸을 때 약을 참 많이 먹었었다.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도 잘 걸리고,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 발전할까 봐 엄마가 주사 놓는 법까지 배워서 엉덩이 주사를 놔줬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가끔 내 새끼들이 아플 때면 남편 없이 남매를 키우랴, 돈도 벌랴 고생하신 엄마 생각을 하였다. 고달픈 인생을 끝내려고 한 번은 산에도 올라가신 적이 있었다고 했다. 한나절을 넋을 놓고 시간을 떼우는데 우리 엄마의 새끼였던 내가 배고프다고 칭얼대어 그 산을 내려오셨다고 했다. 어미 된 죄로 새끼를 살리려고 죽음의 문턱을 넘으셨다. 어쩌면 그날 내가 엄마 곁에 있어서 그리고 배고프다고 보채서 엄마를 살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큰 아이는 대학을 들어갔다. 그 애가 초등학교 졸업하는 날, 어미란 사람은 새끼에게 축하는커녕, 7년간 수고한 아이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고 상장 하나를 못 받는다고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학교에서 A 성적을 못 받아오면 그 아이를 볶았다. 첫 아이라서, 뭐든지 처음이라서, 무엇을 하든지 기다려 주지 못했다. 들들들, 달달달 그 아이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착한 심성으로 그 아이는 내가 힘들 때, 늘 내 옆으로 와서 못된 엄마를 거들어 주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사진 찍으러 나돌고, 한글 교사를 하겠다고 정작 제 새끼들을 건사하지 못할 때 지들끼리 라면 끓여 먹고, 놀면서 엄마를 기다려 주었다. 수많은 밤 기저귀 갈고, 젖먹이며 억지로 눈 비비며 몸을 일으켜 세워야 했을 때, 때때로 나는 잠 좀 자자고,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이었다. 하지만 새끼들은 엄마라서 좋아했다. 어두워도 엄마 얼굴을 보면 눈 맞추고 방긋 웃어 주었다. 그 해맑은 웃음을 밤에도, 낮에도 보여주었다. 


‘내가 너희를 돌보는 것이 아니구나. 너희가 엄마를 돌보는 거였구나. 내가 너희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너희가 엄마를 지켜준 거였구나...’ 


여전히 나는 나쁜 엄마일 때가 있다. 실컷 애들에게 상처 될 만한 일을 저지르고는 뒤돌아 후회하고, 미안해서 아이들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그리고 용서를 또 한 번 구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런다. 


“엄마, 이미 용서했어. 엄마” 


이 맛에 새끼를 키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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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위대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엄마라는 이름 밑에서 모든 엄마는 다 같은 엄마가 되고,
새끼는 다 같은 새끼가 됩니다.
진솔한 마음으로 적어 내려간 한편의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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