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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남자가 무를 썰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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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0-15 03:48 조회4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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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 따위, 믿지 않습니다. 자고로 사랑이란! 오랜 시간 함께하며 조금씩 자라나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라 믿는 나에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 라야 말이지요. 몇 년 전, 그런 나의 믿음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첫눈에 반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지요.  가만있을 리 만무한 남편은 머리만 하얘졌을 뿐, 늙지도 않는 질투심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잃은 이성은 칼을 뽑아 들게 했습니다.


내 평생 첫눈에 반한 남자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남편을 두고 사랑에 빠진 것이 처음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남자이니 그러려니 할 줄 알았지요. 질투심엔 내성도 안 생기는지 "나 아직 안 죽었어"하며 장도를 뽑아 든 남편은 당신께 결투를 신청하고 말았습니다.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란 건 남편도 저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열 두척의 범선을 거느린 당신이 150여 명의 군사들 속에 서 계실 때 눈빛 하나로 적군의 전의를 잠재워 버리신 당신을 그 누가 이길 수 있겠는지요.


클라우디오님!

일주일에 한두 번 남편의 퇴근이 늦는날이면 나는 집안의 불을 끄고 당신을 기다립니다. 몇 달 전의 일입니다. 그날도 당신이 오시기로 한 날이었기에 나는 불을 끄고 커튼을 쳤습니다. 그리곤 TV를 켰지요."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했던 나의 영웅이시며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처럼, 당신도 열두 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무대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여덟 대, 열대까지 거느린 장군은 봐 왔지만 열 두척의 범선이라니요. 열 두대의 커다란 함선 같은 콘트라베이스를 거느린 당신은 위풍당당 개선장군이었습니다. 검은색 연미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당신은 말러 교향곡 9번 연주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클라우디오님!

나는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대신 거금을 투척해 마련한 헤드폰을 착용하고 로열석에 앉았습니다. 그때였어요. 남편이 기별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또 클라리아가?" 짜증 섞인  한마디를 던지며 전등 스위치를 거칠게 올리더군요. 나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클라리아 아니고 클라우디오예요." 남편은 또 한마디 덧 붙이더군요. "아 글쎄, 클라우디고 클라리넷이고 간에 대체 이 영감 어데가 그리 좋은데?" 하는 겁니다. 이유야 한두 가지겠습니까마는 수많은 이유대신 꼭 한번만 들어보라 했습니다. 아니 딱 5분만 들어 보라고 간청했지요. 전곡을 다 들으라고 하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할 것이 틀림없는지라  4악장 아다지오만 들어보라 하였습니다. 남편은 셀폰을 꺼내더니 노래 한곡을 들려주더군요. 김범수의 노래 "하루" 였어요. 나도 그 노래를 좋아합니다만 어디, 클라우디오님과 비교할 수 있겠는지요. 그럼 마지막 10분만 들어보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늘 자신의 동생이라 우기는 장민호가 부른 노래"상사화"를 틀어놓는 게 아닙니까. "자고로 음악은 이런 거 아이겠어, 노래는 이리 부르는 거지" 하더니 "세상에 트롯을 따라갈 음악이 어딨어?"하는 겁니다. 나도 트롯을 좋아합니다. 한국인의 정서와 애환을 구구절절 녹여만든 트롯을 어찌 싫어할수 있겠는지요. 트롯은 물론, 재즈도 팝송도 칸소네 샹송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듣고 즐깁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자신이 좀 더 좋아하는 분야가 있지 않을까요?  


왜 남편은 트롯이 최고라며 트롯만을 우겨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도 한 번은 칼을 뽑아야겠지요.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위엄 있고 힘이 있다지만 때론 뽑아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보자보자하니 내가 보자기로 보여요?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여요? 우리가 살면서 한 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라고 종용한 적 없어요. 적어도 내 취향을 존중해 주던 예전의 배려심많고 이해심 많던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보내버린거에요? " 했지요. 그리곤 당신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 9번의 볼륨을 끝까지 올렸습니다. 헤드폰을 벗어 저음의 콘트라베이스를 포기했지만 하고픈 말을 하고나니 정말이지 얼마나 시원하던지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님!       

한 가지 고백하자면 세상에 지휘자는 캬라얀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말러하면 교향곡밖에 없는 줄 알았고 말러 교향곡 하면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밖에 없는 줄 알았지요. 그랬던 내가 얼마 전까지 일하던 리타이어먼트 홈에 사시는 클레어 할머니 소개로 당신을 알게 되었고 어느새 나도 말러리안이 되어갑니다. 2004년 4월 14일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당신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 9번 실황 DVD를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흘러나오는 말러(Gustav Mahler)는 비장함으로 시작한 4악장에 이르러 클라이맥스로 올랐다가 새벽녘 스러지는 하늘의 별처럼 잦아들며 끝이 납니다.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표현처럼 "세상 구경을 다한 말러가 날개를 접듯"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당신은 두 팔을 접었습니다. 연주자들도 관객들도 당신을 바라본 모든 생명체들은 동작을 멈추고 당신의 호흡에 붙들려 지휘봉을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30초가 지나고 1분, 1분 16초가 지나가도록 말러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당신은 청중의 박수 소리를 듣고서야 숨을 쉬고 돌아서 서 인사를 했습니다. 마지막 1분 16초, 그날 연주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1분 16초였습니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1분 16초였지요.  


내가 당신께 빠져 있는 동안 남편은 조용히 무를 썰고 있더군요. 공주를 구하러 나선 돈키호테도 아니고 아라비아의 왕자도 아닌, 그렇다고 조로도 아닌 남편은 뽑아 든 칼을 그냥 내려놓을 수도 없어 무라도 썰어야 했나 봅니다. 배를 타고 건너온 한국 월동무가 달고 맛나다나요? 나박나박 썰어 넣고 어묵탕을 끓인다며 팔을 걷어붙인 "아직 안 죽은" 남편, "민호야, 행님 신세가 우짜다가 이래 됐노"하며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어묵탕을 들고 앉은 나는"어묵탕은 당신이 최고야" 하며 작은 무조각 하나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웠지요. 그 후로 남편은 더 이상 칼을 뽑지 않습니다. TV 화면에 당신이 나타나시면 남편은 조용히 이어폰을 끼고 어묵탕을 끓입니다. 오늘 밤에도 나는 어묵탕을 먹을 것 같습니다.



P.S.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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