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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문학] 그림자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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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선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0-25 08:51 조회44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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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영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P가 죽기로 결심한 것은, 자살을 선택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어야 할 이유가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가족도, 재산도, 꿈조차도, 아무 것도 없는 삶이었다. 인격자였으나 가난했던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일한 재산인 ‘성실하게’라는 네 글자는, 작금에 이르러 ‘미련하게’와 이음동의어가 되어있었다. 제대 후 복학 대신 선택한 보험영업직에서 P가 겪은 고난은 다양한 상품과 복잡한 약관도, 골치 아픈 자산분석이나 마케팅 전략도, 소위 ‘갑질’을 하려 드는 고객도, 동기부여 한답시고 인격모독성 독설을 서슴지 않는 상사도 아니었다. 네 살 많은 입사동기 M – 입사기념 회식에서 의기투합한 뒤로 친형처럼 여겨왔던 그가, 힘들 때 위로해주고 지칠 때 응원해줬던 그가, 뒤로는 P가 오랜시간 공 들였던 고객을 빼앗아가는 동시에 P의 성과마저 교묘하게 가로채 간 일이었다. P의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무너져버린 그 뭔가를 대충 그러모아서, ‘내 오해였는지도 몰라, 형의 입장을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M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밤 9시, 우리 늘 가던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해요.> M의 답문자가 왔다. <골 때리네. 네가 나라면 거기 가겠냐? 내가 너 같은 멍청인 줄 알아?> 문장 끝에 붙은, 히죽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이 확인사살에 방점을 찍었다.


M이 진급되고 P는 해고되던 날 밤, P는 편의점에서 보드카를 한 병 사들고, 예전에 봐두었던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P는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했지만, 막상 죽자니 맨정신으로는 못할 짓이었다. 난간 옆에 주저앉아 술을 병째로 한 모금 들이켰다. 취기가 미처 오르기도 전에 목구멍 속이 너무 홧홧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찰나,


“청년, 나도 한 모금 주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중년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놀랄만도 했건만 술이 한 모금 들어가서 그랬는지, 빙긋이 웃는 표정에 나즈막한 목소리와 느릿한 말투의 조합이 경계심을 늦춰서인지, 아니면 어차피 곧 죽을 테니 모든 게 부질없다는 심정이었는지, P는 술병을 남자에게 순순히 건넸다. 술병을 받아든 그는 P 곁에 털썩 주저앉더니 정말로 딱 한 모금만 마시고는, 병을 P에게 도로 건네는 대신 P가 몸을 내밀고 손을 뻗어야 겨우 닿을만한 위치에 내려놓았다.


“자네는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고 있나? 보아하니 이 술만큼 독한 결심이라도 한 모양인데… 지금 가나 나중에 가나 어차피 같은 곳에 갈 거라면, 가기 전에 그 속에 품은 거라도 내려놓고 가지 그러나.”


어딘지 나른한 목소리로 차분히 건네는 그 말을 듣고 있는 동안, 그때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괜찮냐고, 네 얘기를 해보라고, 말을 건네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P는 봇물 터지듯 펑펑 울고 말았다. 어쩐지 여태 괴로웠던 진짜 이유는 외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이는 마른 손바닥을 부비며 P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P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옷 소매로 닦는 동안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고 했다. 


자네는 뭔가가 괴로워서 죽으려고 한 모양이지만, 나는 나를 괴롭힌 뭔가를 죽이려고 했었다네. 아, 내 평소 성정이 과격하다거나 괴팍하다거나 잔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진짜로.


아무튼. 내 이름은 우이현, 소설가라네. 등단에 매진하던 때니 벌써 20년쯤 됐군. 당시 나는 강원도 외곽의 방 두 개짜리 작은 독채에 세 들어 살면서 오로지 습작만 죽어라 했어. 생활비는 부모님이 대주셨고. 그땐 나름 젊어서 그럴 수 있었지, 스물아홉이었으니까. 게다가 서른 전에 등단을 못 하면 글을 때려치우겠다고 부모님과 약속을 했었거든.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룸메이트가 생겼다네. 웬 녀석이 찾아와선 자기가 집주인 5촌 조카인데 방 하나 내달라며 집주인이 썼다는 편지를 들이밀더군. 편지 내용인즉슨, 녀석이 대학에 두 번 떨어진 후 군대엘 가려고 했으나 부적응자 판명을 받는 바람에 집으로 돌려보내졌는데, 그 녀석 부모가 지역유지랍시고 체면을 매우 중시하는지라, 대학에 이어 군대마저 못 가게 됐다는 걸 감추기 위해 타지역에서 당분간 지내라고 했다나. 녀석도 소설을 쓰고 싶어하니 선배로서 잘 좀 도와주라며, 추후 석 달은 월세를 안 받고, 그 후로도 반만 받겠다고 써있더라고. 좋다고 했어. 좋으나마나 집주인 제안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지. 어차피 신춘문예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대충 같이 살면 되겠거니 했는데, 하, 이 녀석, 하는 짓거리마다 밉상인거라. 제 방만 어지르면 말도 안 해. 좁은 집안 곳곳에 옷이며 빨랫감에 쓰레기까지 늘어놓고, 밥 먹은 그릇도 제때 안 치우고, 잘 씻지도 않는 주제에 화장실도 더럽게 쓰고. 게다가 말도 안 통해요. 잔소리 좀 할라치면 대뜸 토라져서는… 아, 미치겠더라고. 나는 되도록이면 내 방 안에서만 지냈어. 그렇게 두 주쯤 지났을 때, 공모전에 내려고 야심차게 준비해뒀던 원고가 사라지는 사건이 생겼어. 녀석의 소행이라고 짐작한 나는 녀석에게, “내가 원고를 잃어버렸는데 혹시 어디서 본 기억 없냐”고, 이를 악물고 최대한 점잖게 말했지. 그러자 녀석이 “똥개가 싸놓은 것 같은 글 따위를 내가 왜 훔치냐”고 되려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밖으로 훽 나가버리는 거야. 똥 같은 글이라는 혹평을, 평소 미워하던 놈, 심지어 문학의 미음 자도 모르는 데다가 나이까지 어린 놈에게 갑자기 들은 나는 눈이 뒤집힐 지경으로 화가 났어. 그런데 한 순간, 어떤 위화감이 탁 느껴지는 거야. 하지만 그 위화감의 원인이 뭔지 명징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 임박한 공모전 날짜에 맞춰서 글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으니까. 며칠 후, 고지서 외의 우편물이라고는 좀처럼 오지 않는 집에 웬 소포가 하나 배달됐어. 무심코 포장을 뜯었더니 도톰한 책이 한 권 나오는 거야. 그닥 유명하진 않지만 문학도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의 문예지였어. 이 책 주문한 적 없는데? 하며 표지를 살펴보는데, “최우수상 수상작”이라는 굵은 글자가 눈에 들어오더군. 그리고 그 곁에 나란히 붙은 작품명, <그림자 살인>. 심장이 삐끗하는 느낌이 들었어. 그건 내가 잃어버린 원고에 붙였던 가제였거든. 순간, 일전에 느꼈던 위화감이 기억났어. 나는 녀석에게 원고를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그는 “훔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는 점! 나는 급히 책을 펼쳐 수상작을 읽어내려갔어. 역시 내 글이 맞더군. ‘이렇게 인성이 썩어 문드러진 녀석이 등단을, 남의 글을 가져다가, 그것도 나보다 먼저 하다니, 이건 문학이라는 예술과 모든 문인들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어!’ 나는 녀석을 죽여버리기로 결심했어. 당시 나는 원고를 자필로 쓰는 습관이 있었거든. 그러니 녀석이 내 글을 훔친 거라는 물증이 없잖아. 즉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는 대응할 방도가 없는 거지.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응징하는 방법을 택한… 하아, 이제 와서 말이지만, 녀석이 쓴 글은 내 것과 스토리는 똑같았어도 플롯이며 문장력이 내가 쓴 것보다 훨씬 나았어. 어쩌면 그게 내가 녀석을 죽여버리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였는지도 몰라. 아무튼, 나는 그때 좀 많이 미쳐있었고, 그래서 살인계획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어.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실내에서 숯불로 고기를 굽는다는, 아주 단순한 계획이었지. 술이 약한 편이었던 녀석은, 내가 술과 고기를 쏜다니까 신이 나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는 금방 취해서 늘어졌고, 나는 숯불이 계속 타게 둔 채로 집안 모든 창문을 닫아버렸어. 그리곤 술을 더 사오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났지. 하지만 신발을 신으려는 찰나, 뭔가가 바짓단을 잡아채는 느낌과 함께 바닥에 쾅 자빠졌는데, 녀석에게 술을 부추기려고 같이 마셨던 탓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환한 빛 가운데서 깨어났어. 병실 침대 위에서 깨어났거든. 유독 넓은 창 너머로 환한 햇살이 가득하게 들어와서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는데, 시야를 온통 메운 하얀 빛 속에서 온몸, 아니 내 존재 자체가 빛의 덩어리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면서 문득, 생전 처음 느껴보는, 깊은 평온함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어. 그건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동시에 영원과도 같은, 말로는 이 이상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운, 경험이었지.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매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뒷통수를 때리듯 번뜩 떠오르더군.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 녀석은 어떻게 됐냐고? 글쎄,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놀라운 얘기가 남아있다네. 녀석은 말이야, 죽지 않았어. 하지만 살지도 않았지. 무슨 말이냐고? 음. 녀석은, 없었어. 말 그대로야. 실존하지 않았어. 나중에 정신과와 심리상담을 오가면서 줏어들은 단어 몇 개를 주워섬겨 보자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의식붕괴 및 자아분열, 그것을 허상에 투사… 못 알아듣겠다고? 뭐 간단히 말하면 헛것을 봤다는 거지. 말하자면 나는 내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던 거야. 집주인의 편지라는 것도 내가 어느 습작에서 써먹었던 설정과 내용이 동일했고. 그 문예지에 원고를 수정해서 보냈던 게 실은 나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네. 결국 나는 소원이던 등단을, 반쯤 미친 정신으로 이룬 셈이지. 아무튼 내가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말일세, 자네를 괴롭힌 것이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나 조건 같은 것이든, 결국 자네의 일부이자 허상이라네. 그림자와 싸우지 말아. 허나 정 싸워야겠다면, 그림자를 죽여버리게. 그림자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이 뭔지, 알겠나? …저길 보게.


P는 남자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동이 터온다. 환하게 밝아오는 햇빛이, 훤하게 열린 하늘에 드리워진 어둠을 시시각각 밀어낸다. 이유 모를 눈물이 P의 눈에 자박하게 고여든다. 조곤조곤,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그림자를 죽이려면, 자네가 빛의 근원이 되면 된다네. 자, 난 이제 가봐야겠군. 연이 있다면 어디선가 또 만나지겠지. When the dawn comes, tonight will be a memory too, and a new day will begin.[1] 남자가 부는 휘파람 소리가, 발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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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리 문협(한국문인협회 밴쿠버 지부)의 곽선영 작가가 쓴 <그림자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을 무심하게 읽어 내려갔다. 문장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내가 가는지 내가 읽는 지 가늠할 수 없는 몰입의 경지에서 이야기가 끝났다. 근래 만나보기 힘든 감동과 재미와 의미가 한꺼번에 녹아있는 세련된 글이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문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행복감을 새삼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그림자를 죽이려면, 자네가 빛의 근원이 되면 된다네.”
작가는 이 말을 하려고 애써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이끌어 왔다. 두 번째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글이다.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세밀하게 이 글을 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직 와 닿는 감동이 예사롭지 않게 잘 쓴 글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림자를 보고 있는 사람의 등 뒤에서는 항상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난다. 빛의 근원인 태양에는 그림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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