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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잘 도착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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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1-01 04:42 조회44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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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어린 딸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폐결핵 환자에 알코올과 마약에 찌들어 살면서도 뭇 여자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는 가난뱅이 화가에게 반했다고 합니다. 최고의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미술사에 남을 만큼 용모가 출중한 이탤리언에 스타일리시한 옷차림으로 유명한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가정을 꾸릴 여력은커녕 제 밥벌이도 못하는 서른세 살의 방탕한 남자와의 결혼을 세상 어떤 부모가 허락을 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잔(Jeanne)!

오늘은 2022년 1월 26일, 102년 전 당신이 이 세상의 끈을 놓아버린 날입니다. 이틀 전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36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남편을 따라 22년의 짧은 생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지요.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엔 왜 눈동자가 없나요?"라는 질문에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소."라고 답하던 남편이 죽고 이틀 후, 6층 창밖으로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 방법밖에 없었나요? 더군다나 당신은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떤 이는 모딜리아니를 풍운아라고 하고 경제적인 안정은 주지 못했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어 지극한 사랑을 주었다 합니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이라며 당신과 모딜리아니의 러브 스토리를 사랑의 신화라고들 합니다. 허나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아름다운 사랑이었는지…. 


천국에서도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던 남자, 당신의 영혼을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다던 남자는 당신의 영혼을 알기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물어도 될까요? 목숨까지 바쳐 사랑한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나요? 뼈가 으스러지면서도 가족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을 지고 나가 별을 이고 돌아오는 외롭고 힘든 가장들을 봅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가장이기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쉬고 싶어도 쉬 못하는 수많은 가장들의 휘어진 등허리를 봅니다. 당신이 목숨 바쳐 사랑한 남편은 결혼 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멈추지 않았고, 당신이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친정으로 가 있을 때 당신의 남편은 폴란드 여자 루니아 체호우스카와 동거를 했지요. 물론 자존심 강한 루니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모딜리아니와는 단지 영적인 친구였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도 폭력과 폭언으로 경찰이 드나들게 했고 집안엔 난로를 피울 땔감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술과 마약에 절어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를 발행하고 나면 어쩌면 나는 수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추종자들로부터 뭇 매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도 예술품도 필요하지만 가정을 지키자고, 사랑을 위해 노력하고 책임 지자는 내 말이 매를 맞을 일이라면 기꺼이 맞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이 편지를 쓰겠습니다.  영화 "노트북"에서 한 여자만을 지극히 사랑한 것으로 눈부신 성공을 했다는 노아의 사랑이나 자신의 피를 팔아 식구들의 밥을 사는"허삼관 매혈기"의 아버지 허삼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내와 아이를 둔 가장이라면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와 의무가 있지 않을까요. "그럼 예술은 언제 하고 누가 예술을 하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내 대답은 "유구무언"입니다. 대신, 당신이 목숨을 던져 사랑했던 남편 모딜리아니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의 눈동자를 얼마나 오래 들여다봤고 얼마나 자세히 들여다봤습니까?"

 

안타깝고 가여운 잔! 당신도 화가였으니 아실 테지요. 바로크 시대 화가 귀도 레니를요. 그의 원작보다 엘리자베스 시라니의 모작이 더 유명한 초상화 "베아트리체 치첸"속 베아트리체의 눈동자를 당신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거대한 세상의 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형을 기다리는 소녀의 처연한 눈빛과 슬픔을요. 콜인 데이비슨이 그린 붉은 더벅머리 음류 시인 "에드 시런"의 파란 눈동자에서는 음악을 향한 열정이 흘러넘치고, 미술사에서 제일 많은 자화상을 남긴 렘브란트가 자신이 사망하던 해에 그린 자화상속 눈동자는 말을 합니다. 비극적인 개인사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구요. 눈은 마음의 창이요, 심연의 창이 맞습니다.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다"던 그가 1919년에 그린 작품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의 눈동자에서 나도 당신의 심연을 보았습니다. 가늘고 긴 목선에 살짝 기울인 갸름한 얼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듯한 회색 눈동자. 이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말합니다. 당신 눈동자 속에서 본건 깊고 깊은 슬픔과 허망함이라고요. 그도 당신의 심연을 제대로 봤나 봅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사랑하는 남편곁에서도 외로웠고 다가올 운명의 예감으로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당신의 내면을….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14개월밖에 되지 않은 딸을 남겨두고 8개월이 된 뱃속의 아이와 함께 6층에서 뛰어내려버린 안타깝고 가여운 잔! 자살로 끝내버린 당신의 삶은 너무 아픕니다. 당신의 삶도 아프지만 치열하게 살다 끔찍한 모습으로 가버린 당신, 당신의 등 뒤에 남겨진 자들이 더 아픈 건 내가 부모가 된 탓일까요? 혹여 그들의 고통을 생각해 본 적 없다면 지금이라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딸을 그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잃어버린 부모님의 고통스러운 나날을 들여다 보고, 폐결핵으로 아빠를 잃고 이틀 만에 엄마까지 잃어버린 어린 딸의 충격과 고통에 사죄하셨기를 바랍니다. 백 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잊을 수 없는 당신의 처절했던 삶과 사랑을 이제는 나도 덮어야겠습니다. 죽은 후에야 이름을 얻은 수많은 불운의 천재들처럼, 당신의 남편 모딜리아니 또한 죽은 후에야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 병마와 가난으로 비참하게 살다가 영광과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자선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간 남편곁에서 이젠 당신도 평온했으면 좋겠습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신의 도성"에서 "영생의 나라는 자살한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했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은것도 논쟁할 신학적 지식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구원은 자신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믿기에 자살한 당신도 천국에 도착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주오"하던 그의 유일한 뮤즈로, 사랑하는 아내요 연인으로, 지상에서 누리지 못한 기쁨과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는 복된 날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22년 1월 26일, 당신 영혼의 안식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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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새로운 스타일로 멋진 글을 쓰셨네요.
화가의 경력을 살려서 이런 이야기를 더 해주세요.
이 글을 통해서 박지향님의 내면이 투명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박지향님의 댓글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늘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온도가 제법 많이 떨어져 춥고 미끄럽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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