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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마지막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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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1-30 04:31 조회4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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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웃어. 현악기에 기대 웃고 있었어. 굳게 다문 입술과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뜨는 그의 눈매가 소리 없이 웃고 있었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선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었어. 네 줄 현으로  풀어내는 아픔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의 깊이를 나는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어. "감동적이었다 "는 말로 그의 연주를 가두어 버린다는 건 죄가 될 테니까 말이야. 


리오!

선한 얼굴에 밝고 단정하지만 구석구석 슬픔이 묻은 남자, '리처드 용재 오닐'을 너도 알 거야. 우리는 그가 연주하는 "섬집 아기"를 수없이 함께 감상했으니 말이야.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라는 동요를 기타리스트 김진택과 함께 연주했지. 다 못 찬 굴바구니를 이고 달려오는 엄마를 내세워 우리가 자주 잊고사는 엄마를 불러냈어. 조용히 불러 냈지만 바다 건너 이곳 밴쿠버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파동이었지.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어. 그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나 유키 구라모와 함께 연주한 '레이크 루이스'나 바이올린 귀재 양인모와 함께 한 '파사칼리아'도 그럴수없이 좋아. 제63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최고의 클래식 기악 솔로 부문 최고상을 안겨준 '비올라와 쳄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대단했지. 하지만 이 짧은 동요 한곡을 넘어서지는 못했어. 어떤 이는 "모른다"하고, 어떤 이는 "잊었다"고 해. 또 어떤 이에게는 산 채로 죽으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단 네 줄, 현으로 부활시켰으니 말이야


그는 6.25 전쟁직후 전쟁고아 신분으로 미국에 입양된 여자의 아들로 태어났어. 엄마는 미혼모에 정신지체자였지. 엄마를 입양했던 아일랜드계 미국인 조부모님은 사랑과 정성으로 딸을 키웠고 딸이 낳은 아들 용재 또한 사랑으로 키웠어. 가난했지만 바이올린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셨고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고 김치까지 손수 담가 먹이셨다고 해. 한국어도 못하지만 "나는 한국인이에요"라고 대답하는 엄마에게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TV 스크린에 등장했어.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고 꾸밈없었어. 약력을 열거할 필요조차 없는 명성의 소유자인 그가 어머니의 남자친구가 일하는 시골의 작은 카페에서 연주를 하더군. 연주를 하기 전 연습에 열중하는 그를 봤어. 그 보잘것없는 작은 무대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는 연주자 이기 전에 멋진 '사람'이었어. 아기를 품듯 엄마를 품고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린 용재 오닐의 맑고 투명한 영혼에 빠져 들고 말았지. '아름답고 귀하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오더군. 가능하다면, 추한 건 감추고 할 수 있다면, 예쁘게 포장지를 입혀 장식하고 싶은 허영 따윈 그의 핏속에 없었어. 


네 살부터 영어를 사용했지만 문법에 맞지도 않는 영어를 사용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학교 청소를 하는 엄마가 잘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부모 같은 아들이었어. 엄마를 업고 걸어가야 하는 그의 삶은 매 순간이 도전이었을 거야. 공부를 못한 건 '돈이 없어서', 직장이 없는 건 '줄이 없어서', 그 모든 것이 '모두 부모 탓'이라는 어른아이를 만난 직후여서만은 아닐 거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 용재오닐.... 꼭 한번 안아주고 싶었어. 자신의 못남을 정당화시켜 줄 핑계를 찾자고 들면 핑계 아닌 게 어디 있겠냐마는 그의 사전에 핑계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이 사람을 말이야. "베어버리자고 들면 잡초 아닌 게 없고 품으려고 하면 꽃 아닌 게 없다"는 문장을 읽었어.  잡초가 아닌 꽃을 선택하며 깊고 향기로운 그가 비올라를 말해. "비올라는 중간자예요. 바이올린의 고음부와 첼로의 저음부 사이에 있어요. 양쪽 입장에서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어떻게 도와줄까를 연구하죠. 타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느낌을 받아들이면 내 내면의 소리도 깊게 성장합니다. 감정이입과 공감은 저의 본능이에요."라고.


공감이 본능이라는 용재 오닐... 그를  관통하는 단어 하나를 뽑으라면 그건 "사랑"이겠지.  돌봄을 받고 싶은 나이에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사랑의 힘이지. “자신이 세상에서 받은 도움만큼 도움을 되돌려 주기 위해 음악을 한다”는 긴 문장을 한 단어로 줄이면 그 또한 사랑이야. 안산에서 다문화 아이들을 이끌고 있는 "헬로 오케스트라"에 쏟는 그의 열정도 사랑이라는 동력이 작용한 것 아니겠어? 단테가 신곡전체를 통해 전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야. 지옥과 연옥을 지나 천국편 맨 마지막에 발견한 그의 마음, 들어볼래? "여기서 나의 환상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 내 소망과 의지는 이미, 일정하게 돌아가는 바퀴처럼,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이끌고 있었다." 라며 신곡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도움을 받아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풀어가지만 단테의 구원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어. 나고 자란 환경 탓을 하며 망가져 지옥의 불방망이를 맞을 수도 있었던 용재 오닐을 구원한 것 역시, 자신 안에 샘솟는 사랑이었어.


기억하니 리오? 

"저는 곡의 정체성이 더 중요해요. 음악을 표현하려는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은 사라지고 음악만 남습니다. 인상을 남기려는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만 남지요. 나는 음악을 표현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자아는 완전히 사라진 채로요." 하던 말.... 한곡 동요로 죽으신 어머니를 부활시킨 그의 연주는 감동 이상이었어. 한마디로 '최고'였다는 말이지. 하지만 나는, 자신은 사라지고 연주만 남기고 싶다는 그의 원()을 들어주지 못했어. "어머니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 목표라는 그의 인성(人性)이 연주보다도 빛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뤄냈느냐"가 아닌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를 생각한다는 그가 부활시킨 어머니를 생각해. 다 못 찬 굴바구니를 이고 홀로 잠든 아기를 향해 달려가던 섬집엄마처럼, 피 끓는 그리움을 말로는 다 못하고 수없이 많은 날을 기도하시고 수없이 많은 꿈에 달려오셨을, 이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우리 엄마를.... 자손들 생각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좋은 날에 가시기를 원하시던 우리 엄마는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고요한 날,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셨어. 생전에 달고 사시던 '노래'로 우리 육 남매를 묶어놓고 가셨지. 우애가 남달랐던 우리 형제자매였지만 엄마가 요양원으로 들어가시면서부터 자잘한 오해와 서운함으로 우리들 사이에 개울이 생기고 강줄기가 생겨났어. 더 깊어지면 건너지 못할까 염려하셨던지 "지금 말고, 따뜻한 봄에... 따뜻한 봄에"가 시라 오열하는 큰아들의 원을 뒤로하고 먼 길 떠나가셨지. 죽음으로 우리들 사이에 흐르던 강을 메워놓고 말문 닫으시고 이틀 만에 서둘러 가신 거야. 혹여 자식들 힘들까, 더 춥기 전에.... 


너도 봤지 리오? 

많이 춥지 않았던 2023년 11월 15일 오후 1시 13분, 하늘을 날아오르던 새, 너도 봤지? 붉은 흙으로 덮은 울 엄마 묘지위로 빙빙 돌던 새 한 마리.....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 하늘 저편으로 훨훨 날아올랐어. 그 순간, "엄마 가신다. 우리 엄마 천국 가신다" 며 모두가 뜨거운 눈물로 서로를 끌어안았지. 자신은 사라지고 연주만 남길 바랬던 용재오닐처럼 육신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셨지만 울 엄마가 주고 가신 사랑은 영원히 살아 숨 쉴 거야. 어릴 적부터 노래처럼 들어왔고, 마지막엔 눈빛으로 하신 "형제자매밖에 없다, 서로 사랑해라"는 말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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