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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우체통] 왜 그때까지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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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2-15 09:11 조회2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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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만 존재하는 그리움, 그것은 실현될 때 증발하는 기체 같은 것이죠"라고 김도형 시인께서 댓글을 달아주셨어. 내가 답글을 달았어. "실현될 때 증발하는 기체, 어느 바다로 가면 이런 문장을 건져 올릴 수 있나요?"라고.


생각나니? 

데친 상춧잎같은 네 목소리가"내일 지구에 종말이 왔으면 좋겠어"하며 내 가슴으로 무너졌어. 몇 년을 소식을 끊고 살던 네가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한 말이야.  나는 애써 웃으며 "지구에 종말이 오면 뭐 할 거야.?" 했어. 네가 대답했어. "너에게 갈게" 내가 다시 물었어."왜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데?"라고.... 그날의 대화를 "그냥 오세요"라는 제목을 달아 책갈피에 끼워 두었지. 행여, 올 수 없는 네 마음이 긁힐까 보내지 못하고 한겨울 칼바람 속에 선 네 마음을 오래도록 바라만 봤어. 살아내야 하기에, 올 수 없는 네 마음이 다칠까 봐 보내지 못한 그날의 내 마음을 이제는 보여줘도 될 것 같아 펜을 들었어.

 

펜을 들고 보니 너에게 손 편지를 보내던 때가 그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그때, 매일 만나도 매일 보고 싶어 쪽지를 주고받던 네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어. 아니, 시집을 갔어.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유학을 포기하고 결혼을 택한 넌 대단할 것 없는 대단한 집으로 시집을 갔지. 내가 대단할 것 없는 집이라 말하는 딱 한 가지 이유는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 집이여서지. 내가 그저 돈 많다는 이유로 부자를 경멸한다거나 돈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란 걸 너도 알 거야. 나도 돈이 많으면 좋겠어. 돈이면 해결되고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간은 물론이요 '인심'까지 살 수 있는 돈의 위력이야 무슨 설명이 더 필요 하겠니?.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까지 있으니 말이야. 어떤 색깔의 힘이 든 간에 그 돈의 위력을 느껴서였을거야. 결혼식을 앞두고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는 심청이 같아"라는 말로 시작한 편지는 "그래도 잘 살아보고 싶어, 잘 해낼 거야"라고 두려움인지 각오인지를 눌러 적은 글이 너의 마지막 손 편지가 되었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안고 담장 높은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집은 담장만 높은 게 아니었어. 시부모님과 시누이는 가정을 지키고 어린 딸을 지키겠다는 인내와 각오로도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어. 그 또래 여자들이 하루에도 몇 통씩 주고받는 전화 한 통을 넌 벽을 넘어야 할 수 있었어. 전화 한 통, 외출 한번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집. 돈 좀 가졌다 하는 모든 남자들이 그런 것도 아니건만 외도가 가진 남자의 권리나 특권인양 당당하던 남편이었어. 그런 아들을 지지 옹호하다 못해 "남자가 사회생활하다 보면 바람도 피우고 하는 거지, 잘나고 돈 있는데 바람도 못 피우면 등신이지 그게 사내냐? 네가 들고 다니는 가방도 네 남편이 번 돈으로 산거야" 했다는 시어머니는 '넘다가 네가 죽을 벽'이었지.  하나뿐인 딸의 양육권까지 강탈당하며 이혼을 했고, 이혼만 해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홀로서기가 쉽지 않았던 네가 방황 끝에 한 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왔으면 좋겠어."  


기억나니?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 모든 것을 잃은 네가 나에게 복어국을 사주었어. 복국을 먹으며 “혹시라도 먹고 죽음 어떻게 해?” 하자 유치원생 딸을 둔 네가 "죽는 게 무섭구나?" 했어.  죽는 게 무섭지 않냐는 나의 물음에 "잃을 게 없는데 무서울 게 있겠어?" 하던 네가 생의 끈을 놓고 싶다고 했어. 밴쿠버로 떠난다는 내 말에 "빨강머리 앤의 초록지붕, 같이 볼 수 있겠구나" 하던 네가 "죽으면 이 고통도 끝나겠지"했어. 무서웠어. 통화가 끝나면 국가번호 82를 누르고 119를 눌러야 하나 망설이며 가만히 듣고 있었어. 한참을 얘기한 끝에 네가 결론을 내렸어. "나, 다시 일어날 거야, 난 엄마잖아"


18년 전 그날 밤 너는 밤새 칼을 갈았어. 활을 들고 첼로를 연주하던 네가 활 대신 시퍼런 복수의 칼을 갈며 희뿌연 새벽을 맞았다고.... 칼을 들고 일어선 너는 복수 대신 요리를 택했어. 요리사가 되고 몇 년 후, 넌 내게 선물을 보내왔어. 몸서리치게 그리워하던 딸과 함께 냉면 가락을 들어 올리며 웃는 사진 속에 보랏빛 수국처럼 환한 네 얼굴을..... 


사랑하는 선!

대학시절의 넌 모두가 뒤돌아 볼만큼 예뻤어. 흰 면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긴 생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캠퍼스를 활보했지. 눈부시도록 예뻤고, 아직 너무 예쁜 네가 홀로 밤을 맞이하고 홀로 밥을 먹을 때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어. "그때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어떻게든 공부를 계속했어야 했는데, 그때 끝까지 딸을 안고 싸울걸" 하며 수없이 많은 "그때"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 돌리고 또 돌리는 사랑하는 내 친구 선아! 나 역시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란 걸 너도 알아. 그렇지만 난 이 삶을 사랑하고 감사해.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선택한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삶이 되었고 최선을 다해 살았어. 그러니 우리가 꿈꾸던 삶은 아니지만 이만큼 살아낸 너에게도 나에게도 '멀고 험한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 계속해서 잘해보자'라고 말해주면 어떨까. 우린 아직 다 살지 않았잖아?


현재시각 한국시간 11월 27일 오전 7시 30분이야.  지금쯤, 생일엔 한아름 장미를 안고 온다는 딸과 함께 생일밥을 먹고 있을 네가 며칠 전에 그랬지. "그리워, 네가 그립고 네가 사는 밴쿠버가 그리워"라고. 그런데 선아, 내 친구야! 우리 이제 그만 그리워해도 되지 않을까?. "실현되고 증발해버리는 기체"가 될지라도 난 네가 보고 싶어. 그래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 대신 18년 전 그날 밤 보내지 못한 내 마음... 이제는 보낼게. 



그냥 오세요/ 박지향



당신이 물었습니다

"지구에 종말이 오면

무얼 할 거냐"라고


내 대답이

'당신께 가려구요'


당신은 또 물었습니다

"왜 그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PS: 그거 알아? 우리 집 대문엔 자물쇠가 없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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