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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내가 어떻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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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2-31 22:04 조회28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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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따라옵니다. 내가 좌회전을 하면 그도 좌회전을 하고, 내가 차선을 바꾸면 그도 차선을 바꿉니다. 하이웨이를 들어서자 그때까지 따라오신 당신은 반짝반짝 경광등을 켭니다.  아무래도 차를 멈추라는 신호인가 봅니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앉은 채로 창을 내립니다. 천천히 다가온 당신이 묻습니다. " Are you okay?  눈물로 얼룩진 내가 대답합니다. "안 괜찮아, 내가 어떻게 괜찮아?"


기억하시는지요? 2012년 3월 21일, 바운더리를 조금 지난 1번 하이웨이 남쪽 선상에서 "너 괜찮니"라고 물어주신 경찰관님! 벌써 1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 유 오케이" 물으시던 그 목소리 그 눈빛 방금 본 듯 선명하네요. 당혹스러우셨지요?  어쩌면 형식적일 수도 있는 문장, "너 괜찮니?"라는 물음에 내가 어떻게 괜찮을 수 있냐며, 더 크게 울어버린 여자,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도록 목놓아 우는 여자를 가만 서서 기다려 주셨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차 키와 운전면허증, 차량등록증을 달라 하셨습니다. 경찰차로 돌아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조회하셨겠지요. 내 차로 돌아온 당신이 다시 물었습니다. "너 괜찮니?" 그리곤 무슨 일로 우는지  어디 가는 중인지 직업이 뭔지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기보다 그동안 쌓인 감정들을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서러움과 함께 쏟아 냈지요.  정직하게 살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은 왜 자꾸 나를 배신하냐고, 아직 갈길이 먼데 난 길을 잃었다고…. 


전 재산을 투자해 산 기프트 샵을 권리금은커녕 일전짜리 페니 한 개 못 건지고 문을 닫았습니다.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글로벌 그룹이 운영하는 대형 기프트샵이 문을 연지 1년 만이었지요. 그 많은 물건들 중  일부는 껌값으로 넘기고 반은 기부하고 또 남은 반은 쓰레기 처리 업체를 불러 처분하였습니다. 쓰레기가 되어 실려나가는 자신의 피 눈물을 남편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사무실 벽도, 창고도, 원래 없었던 내부시설은 모두 철거해야 했습니다. 누군가 가게를 인수하지 않는 이상, 원래의 텅 빈 건물로 복구해서 반환해야 하는 계약조건을 이행해야 했으니까요. 남편은 그 과정을 저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철거작업이 시작되기 전,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지요. 당신을 만난 날이 바로 그날 이었습니다.


겨우 울음을 그치자 천천히 조심해서 가라며 차 키를 돌려주셨지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던 당신은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왔습니다. 아이들 하교 시간이라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이들 학교로 향했고, 당신은 내가 학교 앞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에스코트를 해 주셨습니다. 까짓, 울면서 운전하는 동양인 여자 하나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건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괜찮냐 물어주고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엄지를 추켜올리며 돌아가셨지요. 누군가의 안전을 확인해 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데는 많은 힘을 필요로 하거나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기를 담아 물어주는 한마디 "너 괜찮니?"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반 평생도 넘게 산 내 인생, 돌아보니 이룬 것도 자랑할 그 무엇도 없는 초라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자랑할 일 한 가지쯤은  있지 않냐 물으신다면 "그때 나보다 더 힘들었을 남편과 아직 너무 어린 두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은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경찰관님 덕분이지요. 그날 마음껏 울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죄 없는 당신 앞에 내 억울하고 서럽고 외로운 이민살이를 토해 낼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부패한 경찰관들의 악행과 비리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경찰관도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이라 쉽게 말 하지만 당신 같은 경찰관과 함께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안전하고 또 따뜻한지요. 나는 오늘도 죽을 이유보다 살아갈 이유가 훨씬 많은 세상을 걷습니다. 나를 일으켜 세운 마법의 문장 "너 괜찮니?"를 들고.... 경찰관님도 안녕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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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한 편의 글이 그 동안 박시인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짐작하게 만듭니다. 이민 사회에서 비즈니스에 실패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일은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숨겨진채 모르고 지나갑니다. 많은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늦게나마 너무 심금을 울리는 방식으로 공감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지난 일들이지만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고통의 기억을 지울 때입니다. 위로와 격려를 뒤늦게나마 보냅니다.

박지향님의 댓글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다시는 겪고 싶지않지만 고난의 의미와 이유를 알고부터는 볼이 터져라 웃으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따뜻한 댓글로 데워주셨는데 오늘은 "동지들이 있다"는 말씀에 봄이 성큼 다가선 듯 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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