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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시간]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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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1-01 18:43 조회2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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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을 누비고 있다. 한국 생활 첫 삼 년동안 동거한 수언니가 강원도 남자와 결혼해 속초에 자리 잡은 지 서너 해가 지났다. 소주에 회를 즐기던 언니가 운명처럼 바닷가로 시집갔다. 덕분에 일주일은 속초와 양양을 쏘다니며 동해 바람을 실컷 맞을 마음이다. 



수언니의 작은 차를 몰고 부서지는 파도의 리듬을 따라 해변선을 춤추듯 달린다. 바다 앞에 서면 나 자신으로 가장 정직해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내 마음을 대신해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요동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나는 오히려 잠잠해진다. 파도가 발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가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한참 들여다본다. 


여행 중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좌표를 찍을 때 나는 환호한다. 그제야 나를 묶어두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낀다. 모래사장 위로 흐르는 짠 바람에 나의 두려움과 불안을 흩어 보낸다.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걱정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해방을 맞는다. 


한참 바다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수언니가 부른다. 바닷바람에 얼었던 몸을 녹이자며 속초 시내의 한 카페로 향한다. 현지인답게 관광객은 모르는 지역 사람들이 찾는 거리로 데려간다. 동네 전체가 한적하다. 들어선 카페 이름은 ‘소설’이었다. 


카페 안은 오래된 LP와 때 묻은 소품으로 빼곡하다. 젊은이의 힙한 감각을 자랑하는 양양의 카페들과는 대조되는 오래되어 낡은 카페였다. 주인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홀로 음악을 듣고 있다. 우리가 들어오자 노신사는 음악을 바꿨다. 전인권의 목소리가 흐른다. LP의 자연스러운 소리와 카페의 훈훈한 공기가 만나 우리 주위를 맴돈다. 


철 지난 정장을 입은 노신사는 정성껏 커피를 내려 우리 앞에 내어놓았다. 오랜 세월 쌓인 기품과 친절이 몸에 배어 있다. 나는 카페 이름을 이맘때인 절기 ‘소설’ (小雪 )로 읽었는데 수언니는 문학 ‘소설’ (小說) 같다며 노신사에게 그 뜻을 물었다. 그는 웃으며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의미를 넣어 부르면 된다고 했다. 나는 눈 내리는 산장에 온 것처럼 전인권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수언니는 소설 한 장면을 소환하며 커피를 마신다. 


노신사가 평생 음악을 사랑하며 모았을 오래된 음반과 카페 안의 때 묻은 소품을 찬찬히 보았다. 장소가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우리는 낡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닳고 닳아 맨질거리는 의자와 거뭇거뭇한 벽까지 세월의 얼룩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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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마저 늙고 낡았다. 찬란했던 모든 색이 세월 속에 벗겨지는 장면을 본다. 한 때는 반짝였을 그 빛은 천천히 오래 바랜다. 세월이 잔뜩 묻은 곳에 있으면 세상 한 바퀴를 돌고 마침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미래의 늙고 소멸해가는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이상하지, 

가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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