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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우체통]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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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1-15 20:25 조회3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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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끝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흰 눈 속에서 빨간색 등불을 들고 서 계신 당신을요. 약속도 기별도 없이 찾아오신 당신께서 "여기까지 왔구나"하셨습니다. 광속으로 달려온 20년 세월, 겹겹이 쌓인 그리움과 회한(悔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지요. 하여 무조건 내편이시던 당신께 나는 여태 꺼내 보인 적 없는 눈물로 동백꽃보다 붉은 편지를 씁니다.


아버님! 

밤새 내린 눈으로 뒤덮인 하얀 섬, 밴쿠버 아일랜드에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새빨간 동백이 피었습니다. 아버님 계신 천국에도 동백이 피는지요. 당신이 계신 그곳에도 동박새 울고 동백꽃이 피고 또, 지는지요. 해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아버님께서 심고 가꾸신 동백꽃을 대바구니 가득 주워 담아 꽃잔치를 벌였습니다. 유리컵, 커피잔, 항아리 뚜껑에 물을 붓고 빨간 동백꽃 동동 띄워 식탁에, 창가에 올려두었습니다. 어둠이 몰려오면 물을 담은 항아리 뚜껑에 불을 밝힌 티 라이트와 함께 띄운 동백꽃을 곁들여 찻상을 차렸지요. 녹차를 우리는 동안 물 위에 떠다니는 촛불과 꽃을 바라다보시며 "이렇게 살아야제" 하셨지요. 


저희가 한국을 떠나 올 때 "나는 게안타, 너거만 행복하먼... 어무이 걱정은 말거라 " 하시며 잘 다녀오라 웃어 주셨습니다. 마지막 포옹을 나누며 "애비가 까탈시러버서 힘들었제? 카나다 가서도 까다롭게 굴먼 내삐리고 아부지한테 오거라"하셨지요. 눈물은 참아도 떨리던 아버님 음성, 잊을 수가 있겠는지요. 떨어트리지 않아도 떨어져 강물이 되던 속울음을 어찌 몰랐겠는지요. 깊고 넓어 잔잔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도 강바닥은 결코 잔잔하거나 고요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말없는 그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원 없이 사랑해 주신 아버님!

큰아이를 임신하고 과일만 먹는다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혹여 과일이 떨어질까 매일같이 박스채 과일을 보내 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래 위층 이웃들까지 과일 호강을 하고 부러움도 샀지만 더러는 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시기 질투쯤이야 얼마든지 기뻤지요. 그뿐이겠습니까. 대단한 그림도 아니건만 전시회를 할라치면 누구보다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 그림보다 크고 환한 풍경을 선물하셨고, 편지 한 통을 받으시면 전화 세 통을 걸어주신 속정 깊고 큰 어른이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두고 어쩌자고 이민길에 오른 걸까요. 비행기를 탈 땐 아이들이 대학을 입학하면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잠시 다녀 올 여행 길일 줄 알았지 이리도 먼 타향살이가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된장찌개에, 굵은소금 툭툭 뿌려 구운 고등어로 아침상을 차리고, 다진 돼지고기와 부추를 썰어 넣고 빚은 만두로 점심상을 차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스름 밤이 오면 아버님 좋아하시는 동백꽃 띄운 찻상을 차리고 아비 흉을 시작으로, 아비 등을 쳐 먹고도 꼿꼿이 얼굴 들고 사는 뻔뻔스러운 세상 이야기며 맘껏 자랑해도 흉이 되지 않는 아이들 이야기를 밤새 풀어놓으며 살자 했습니다. 


그런 따뜻한 고국을 떠나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타국의 삶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방 한 칸을 내주었지요. 깨지고 넘어지며 들고 갈 한 오라기 자존심마저 남지 않았을 때, 고국으로부터 받은 소식은 사십 년 넘게 지키시던 병원을 키우던 고양이에게 빼앗기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모든 것 다 잃고 누우신 아버님은 "애기야 미안타,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몬해서" 하시며 뒷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갤러리를 지어주시겠다던 약속이었지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바로 저였으니까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평생을 앓아도 사면받지 못할 죄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제가 바라보는 꽃, 아버님도 보고 계신지요.  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꽃 그림들로 가득 찬 갤러리입니다. 두 팔이 없어도 두 다리로 생을 지어가는 사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고 고아들을 위해 생을 바치는 어미, 햄버거 하나를 둘이 나눠 먹으며 서로 큰 쪽을 먹으라 권하는 가난하지만 넉넉한 부부, 찢기고 부러져도 가족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가장의 휜 등허리... 눈물을 뿌린 자리에 꽃을 피우는 이 모든 삶은 살아 숨 쉬는 그림입니다. 더럽고 불쌍하고 추해서 지워야 할 어두운 뒷골목이 아닌 스포트 라이트를 비춰주고 꽃다발을 안겨 마땅한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란 걸 아프게 배워 갑니다.


그리운 아버님!

세상의 불화살이 날아 올 때 "힘들면 아부지한테 오거라"하신 목소리를 갑옷처럼 입고 살았습니다. 주저앉고 싶을 땐 "이렇게 살아야제"하신 말씀 지팡이처럼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살아진 세상, 담장 너머로 고개 내민 동백을 만나고 때론 길 모퉁이에 핀 동백을 만납니다. 그제는 못다 부른 노래였다가, 어제는 피 끓는 그리움이던 꽃을요.  오늘은, 힘껏 피어 봤고 맘껏 붉어 봤으니 통째로 떨어져도 원 없다 하는 동백꽃 꽃잎 위에 편지를 씁니다. 아버님 며느리로 산 16년, 원 없이 행복했던 시간을 길어 올려 불을 밝히고, 여태 꺼내 적 없는 눈물로 쓴, 동백꽃보다 붉은 그리움, 받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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