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빨간우체통] 왜 4년이나 걸렸어?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LIFE

문학 | [밴쿠버의 빨간우체통] 왜 4년이나 걸렸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1-31 21:08 조회289회 댓글0건

본문

1823215437_JujzHZV6_7a5d534f5bc8167eb32f4fba164d34c5b5ea220a.jpg


  

4년 전이야. "내가 다시 결혼을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고 했어.  반드시 너와 결혼할 거라 자신하는 남자에게 네가 돌려준 대답이었지. 그 말을 들은 내가 "그 등신 놓치고 후회 안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고 했어. 우린 누구 손가락으로 지진 장을 먹게 될지 두고 보자며 전화를 끊었어.


쉬는 날이면 빵과 커피를 가져다 놓고 가는 남자. 추운 겨울밤 식당문을 나서기 전, 자동차 시동을 걸어 차 안을 데워놓는 남자. 돈도 많고 잘 생겼지만 한 여자만 바라보는 등신 같은 남자. 그 남자를 두고 내가 물었지."혹시 하자(瑕疵) 있는 거 아냐?" 그러자 네가 말했어."그러게, 그런데 하자는 없고 그냥 좀 특이해, 나 특이한 거 안 좋아하잖아" 했어. 그렇게 말했지만 넌 많이 좋아하고 있었어. 다만 두려웠던 거지. 너무 깊은 상처로 남은 첫 결혼의 기억은 쉽사리 널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네가 세 살 연하의 그 특이한 남자와 결혼을 한데. "두렵지만 한번 살아보려고"했어. 친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받으며 웃음을 찾은 딸이 고민을 털어놓고 미래를 의논하는 상대라고 했어. "두렵지만 한번 살아보려고"할 때와 달리 네 목소리는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했어. "특이한데 엄청 편하고 착해" 하는 네 전화를 끊고 카톡 대문을 열었어. 희끗한 머리가 멋스러운 옆모습의 남자가 너와 함께 설거지하는 순간이 문패처럼 걸려 있었어.  눈물이 흘러내렸어. 오랜만에 맛보는 기쁨의 눈물.


오른쪽 검지로 눈물을 닦으며 너의 기다란 손가락을 떠 올렸어. 그러고는 '어떻게 장을 지질까?' 생각했어.  4년이나 묵힌 장이니 얼마나 깊고 구수할까? 그 맛을 기대하며 결혼식 때 부를 노래를 찾아봤어. 내가 가끔 뜬금없이 용감할 때가 있잖아? 아무도 안 시켜 줘도 "제가 노래 한곡 할게요." 라던지 "춤추실래요?"라고 해서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이방인이냐고 수군대도록 하는... 오랜만에 그 기쁨을 주고 싶어서 말이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 "So I'm gonna love you like I'm gonna lose you / I'm gonna hold you like I'm saying goodbye " 라 노래하는 Meghan Trainor의 소울 풀한 목소리가.... 내 셀폰 벨 소리로 설정해 놓은 곡 "Like I am gonna lose you"였지. 찾고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이 거다"싶었고 이 곡이어야만 했어. 


(전략)

No, we're not promised tomorrow (우린 내일을 약속하지 않았어)  

So I'm gonna love you like I'm gonna lose you(그래서 나는 널 잃은 것처럼 너를 사랑할 거야 )

And I'm gonna hold you like I'm saying goodbye(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너를 안을 거야 )

Wherever we're standing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I won't take you for granted(너를 당연히 여기지 않을게) 

Cause well never know when, when we'll run out of time(우리 시간이 언제, 언제쯤 끝날지 모르잖아) 

So I'm gonna love you like I'm gonna lose you(그래서 널 잃은 것처럼 사랑할게)

So I'm gonna love you like I'm gonna lose you(너를 잃은 것처럼 사랑할게)

(후략)

 

너도 알지? 심플한 멜로디에 가벼운 듯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노래. 약속된 내일이 없는 우리들 삶은 언제 어디서 끝날지 모르니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는 결심이고 고백이지. 이게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아니겠니. 돈 많고 잘생겼는데 바람 못 피우면 등신이란 교리를 내세워 등신교를 설립한 교주와 그를 추종하는 광신도들도 그들 나름의 해석을 붙이며 좋아하는 카르페 디엠.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하고자 했던 '카르페 디엠'은 "이 순간 너의 삶에 집중하라"이겠지만, 돈이 신(神)인 그들에게는"내일은 없어 오늘 맘껏 먹고 마시자, 내일로 미루면 죄가 되는 쾌락, 못 누리면 등신" 뭐 이런


너도 알다시피 "오늘이 마지막날인 것처럼 사랑할게"는 영화"If only"의 주제이기도 해. 타임루프물로 제작된 이 영화가 96분이란 러닝타임을 통해 말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 사랑이 뭔지 몰랐던 이안이 사랑을 깨닫고는 죽음으로 보여주는....  사만다가 탄 택시를 타면 죽게 되는 줄 알면서도 그녀와 함께 택시를 타는 이안이 택시에 오르기 직전, 그녀에게 고백해. "진정 사랑했다면 인생을 산 거잖아, 5분을 더 살든 50년을 더 살든. 오늘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영영 사랑을 몰랐을 거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또 사랑받는 법도"라고. 그런 뒤 사만다 옆자리에 앉은 이안은 사만다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안고 달려드는 차를 자신의 등으로 막지.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던 너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남자. 퇴근 후 너의 식당에 들러 함께 뒷정리를 하고 문 닫는 걸 도와주는 남자. 영혼 없는 남자들의 축축한 시선을 막아주고, 혼자 사는 여자를 향한 세상 험한 가십들이 춤을 출 때도 묵묵히 네 편이 되어준 남자. 파스타를 만드는 너에게 네가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자상한 남자. 누구는 "첼로가 밥 먹여주냐" 했지만 반지 대신 첼로를 안겨주며 두 번씩이나 청혼 한 특이한 사람. 


4년 아니라 400년이라도 기다리라면 기다리겠다던 남자의 두 번째 청혼에 네가 물었어."왜 4년이나 걸렸어?"라고. "더 기다리고 싶었지만 오다가 첼로를 주워서"라  답했다는 이 남자. 네가 없었다면 내가 청혼할 것 같은 이 매혹적인 남자를  넌 오래도 밀어냈어. 밀어냈지만 밀어낸 힘만큼 힘차게 달려가던 네 마음이 드디어 그 남자에게로 가 닻을 내렸어. 닻을 내리고도 그곳이 안전한 곳일까 두렵다고 했어. 왜 아니겠니. 목숨 같던 딸까지 빼앗기고 벼랑 끝에 서서 길이 안 보이던 그 막막했던 날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니. 그렇지만 두려움이 너를 갉아먹도록 허락하지는 마 친구야! 


사만다도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쓴 곡을 노래하지 못하고 "언젠가" 부를 거라고 망설였어. 두려워하는 그녀를 위해 이안이 악보를 75장이나 복사하던 장면 생각나지? 사만다의 졸업 콘서트에서 지휘자와 단원들에게 미리 악보를 주고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부탁하잖아. 그리고 사만다에게는 꽃다발과 함께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야"라고 적은 카드를 전달해. 놀란 사만다는 처음의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며 멋지게 노래하던 그 장면 말이야. 노래를 마친 뒤 활짝 웃던 사만다는 만개한 함박꽃 같았지. 


선아, 사랑하는 내 친구야!

사만다보다 예뻤고 지금도 너무 예쁜 너를 생각하며 겨우내 나가보지 못한 뒤뜰에 나가봤어. 혹시 보내줄 꽃이 있을까 하고... 아직도 군데군데 쌓인 눈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어. 꽃삽을 꺼내 조심조심 쌓인 눈을 들어 올렸지. 두터운 눈을 덮은 크로커스가 노란 꽃봉오리를 꺼내놓고 있었어.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은 아직 멀었지만 봄은 이미 피고 있었어. 그렇게 겨울의 상흔을 덮고도 피어나는 봄처럼, 만개한 꽃 같던 사만다처럼 너도 다시 필 시간이야. 과거는 털고 너의 연주를 시작할 시간. 이안이 쓴 메모처럼 

"그때가 바로 지금이야" 



PS: 바다가 존재하는 한 바람은 불고 풍랑이 일겠지만 

     네가 닻을 내린 포구에서 오래도록 안전하고, 많이 행복하길 기도할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1,129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