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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시간] 엄마의 노래, 엄마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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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3-01 11:05 조회2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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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가지고 있던 먼지 쌓인 LP판을 잔뜩 가져왔다.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지난해 속초의 카페 '소설'에서 묻혀 온 마음이 분명하다. 세월의 흔적을 아끼는 마음, 오래된 것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경이롭게 여기게 되었다.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지금, 오래된 것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다. 왠지 그 안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숨어 있을 것 같다. 엄마의 LP를 들을수 있는 턴테이블을 구입했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 지방과 서울로 옮겨 다녀도 이삿짐에 늘 들어 있던 크고 둥근 판. 다양한 음악을 즐기던 엄마 덕분에 클래식부터, 올드 팝, 한국 포크송까지 집에선 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나 무스쿠리를 이모로 루이 암스토롱을 삼촌으로 삼으며 엄마 덕에 음악과 함께 자랐다. 마음이 편해지는 클래식이나 소울이 짙은 재즈, 사랑과 인생을 절절히 표현한 대중음악을 들으며 내 감성도 풍부해졌다.

 LP시대가 지나고 새로 마련한 오디오에서 더 이상 둥근 판을 듣지 못해도 차마 버리지 못해 캐나다까지 들고 왔던 엄마의 애장품. 캐나다에서도 밴쿠버, 알버타, 미국 테네시 그리고 다시 밴쿠버로 만만치 않은 거리를 우리와 함께 움직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장소와 시간을 함께 한 물건이니 유산처럼 내가 가져왔다. LP판은 엄마 소유, 엄마의 역사였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노래를 듣지 않는다. 인생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신앙이 깊어진 후 듣는 노래가 달라졌다. 신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 같았는데 그럴 것까지 있냐는 나의 핀잔에도 엄마는 꼿꼿했다. 이전에 듣던 세련된 음악대신 투박한 찬송가가 집에 울려 퍼졌다. 자신의 취향은 제쳐놓고 하늘을 향해 따라 부르던 찬송은 엄마의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LP판을 버리지 못한 당신 마음은 무얼까. 내가 가져간다니 LP판을 흔쾌히 내주었다. 삭아서 바스락거리고 누렇게 변한 표지에 젊은 날 엄마의 모습이 비친다. 잊고 있던 엄마의 취향과 그 시절의 공기가 배어있다. 음악 감상실에서 DJ로 음악을 소개하고 사람들의 사연을 읽어주었다던 낡은 이야기가 흥겨운 노래처럼 들린다. 누구 앞에서 노래 한 자락도 하기 싫어하는,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과 반대다. 옛 음악은 다시 오지 않을 흘러간 시절을 소환한다. 지직 거리는 바이닐의 독특한 소음이 우리를 과거로 데려가 주었다. 엄마의 반짝이는 청춘에 함께 머물렀다.

 그 시절이 있어서 지금도 있는 것이리라. 엄마는 젊은 날을 추억하면서도 지금에야 평안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하늘의 섭리와 뜻을 신뢰하는 신앙인에게서 나오는 샬롬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무기력한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하늘의 은총이라며 오늘도 침묵하며 보이지 않는 신을 노래한다. 어떤 음악보다도 기쁨과 감격이 차오른다는 고백은 진실하다. 

 절망의 시간에도 멈춘 적 없는 신을 향한 당신의 노래가 하늘에 닿고 내 주위를 둘러쌓아 나를 지키고 살렸음은 나의 고백이다. 엄마는 지금도 사랑하는 당신의 음악을 나에게 들려준다. LP시대를 지난 엄마의 새로운 노래, 엄마가 신실하게 쌓아가는 세월이다. 나의 정서가 되고 유산이 된, 하늘을 향해 부르는 노래. 이제 내가 기꺼이 이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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