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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우체통] 나에게 남은 여름은 몇번이나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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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3-01 16:14 조회2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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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오너라"하고 부르면 "뉘신지요?" 하고 대답이 넘어올 것 같은 대문을 두드립니다. 커다란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흰 도포자락의 대감님이 서 계실 것 같은 풍월당을 두드립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을 모르실리 없건만 한 여자의 마음을 이리도 단단히 묶어 두시고 어쩜 그리 모른 체 살아가실 수 있는지요. 하여, 오늘은 '살구꽃 향기에 취했다'는 핑계를 지어 미루었던 편지를 씁니다. 그러니'시간 없다'는 말로 피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청록빛 종이 위에 백장미 꽃물로 쓴 편지, 부디 돌려보내지도 마십시오.


선생님께서 당호(堂號)를 지으신 풍월당은 사방으로 바람이 드나드는 누마루에 휘영청 보름달이 들여다볼 것 같은 한옥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우거진 깊은 산속도 아니었습니다. 검은 갓을 단정히 눌러쓰고 희고 넓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마당쇠야 출타 준비하거라"시며 마당쇠를 찾으실 것 같은 '풍월당'은 패션과 유행의 대명사 강남의 한 복판에 있더군요. 즐비한 빌딩 숲 속에 터를 잡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조그만 간판을 내다 건 풍월당은 마당쇠도 대감님도 없는 클래식 전문 음반매장이었습니다. 가봤냐고요? 당연히 못 가봤지요.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냐고요?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쓰신 책들을 읽다 보니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궁금증의 결과가 아닐는지요. 클릭 몇 번이면 못 찾는 것 없고 모르는 것 없는 세상인지라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3만여 장의 클래식 음반과 관련 서적을 갖춘 한국 내 유일한 클래식 전문 음반매장에 카페 '로젠 카발리에'까지 있었습니다. 매장을 찾는 이 들에게 커피는 공짜라 하시니 우선 커피부터 마셔야겠지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한국인의 정서에 충실하여야 도리이니까요. 


커피도 마셨고 그렇게 가고 싶던 매장도 둘러보았으니 이제 대문을 두드린 이유를 말씀드려야겠지요. 13년 전 한국에 들렀을 때 일입니다. 해외에 살다 보니 늘 한국 책에 목말랐던 저는 한국 방문 시 필수 구입품인 김이나 멸치 대신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은 책을 샀지요. 선별에 선별을 거듭한 끝에 구입한 책들 중엔 음악 관련 서적도 몇 권 들어 있었습니다. 그중 선생님께서 발로 쓰신 책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를 제일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열리는 100여 개의 음악 페스티벌 중 18개의 페스티벌을 소개하신 책이지요. 구도자가 성지를 찾아다니듯 수많은 페스티벌을 찾아다녔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엔 "인류가 남긴 최고의 문화와 예술이 있고 최고의 풍광과 유적이 있으며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 하셨지요. 둘러보신 페스티벌에서 벅찬 감동과 시린 아쉬움을 느끼고 "이제 남은 인생에서 이런 아름다운 여름이 몇 번이나 찾아올까?"라는 문장으로 순례를 시작하셨고 나도 선생님 시선을 따라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유럽 제1의 교통요지로 2000년 전부터 로마제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인스브루크 고음악 페스티벌"을 소개하시고는 도시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뒷골목을 봐야 한다" 하셨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과 상관없이 늙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할머니들과 작업실 안에서 작업에만 열중하는 장인들, "작지만 세련되고 우아한 그들의 삶"을 요. 전 세계 바그네 리언들의 성지가 되어버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고운 체로 거른듯한 소리가 가스처럼 극장 안을 채워 나가며 서서히 나의 감각을 중독시켰다"하셨지요.  루체른의 비싼 티켓과 높은 물가로 지갑에 돈이 떨어져도 "진정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백하게 한 스위스"루체른 페스티벌"의 감동을 전하며 그 황홀한 여운이 체 가시기도 전에 취리히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취리히 페스티벌"속으로 저를 밀어 넣으셨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빚는 오감의 축제"라 표현하신 "엑상 프로방스 축제"와 단테가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쫓겨나 마지막에 정착하고 생애를 마친 라벤나의 "라벤나 페스티벌"을 거쳐 "부세토 베르디 페스티벌"까지... 발로 쓴 글의 마력에 포로가 되지 않을 자 누구겠는지요.


어느 것 하나 빠트리고 싶지 않은 음악 축제였습니다.  그중 하나, 잘츠부르크의 "브레겐츠 페스티벌"을 읽으면서는 나는 이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지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3국이 만나는 국경에 위치한 보덴 호수에 황혼이 깔리면 정장 차림을 한 사람들이 담요를 들고 앉아 오페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곳. 호수 위에 떠 있는 무대 뒤로 석양을 받으며 배를 타고 건너온 독일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앉으면 조명이 꺼지고 오페라가 시작되는 보덴 호수... 오페라가 끝나면 그 감동만으로도 벅찬데 올려다본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향연... 손 닿지 않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호수 속으로 낙하하는 별무리를 따라 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밤하늘의 별 밑에서 오페라를 보는 것이 작은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셨지요?  누군가의 작은 소원은 제 소원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낯선 거리에서 넘어질 때, 세상이 뜻 모를 태클을 걸어올 때도 보덴호수는 나를 지켜 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절대로 오지 않을 "언젠가"라는 미래를 품을 때, 오지도 않을 "언젠가" 대신 2023년 5월 7일을 세 겹의 빨간색 동그라미로 묶어 두었습니다. 숫자 7 밑에 "보덴을 향하여! "라는 글자까지 써넣고 말입니다. 1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숫자와 글자를 바라보며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지요. 털고 일어난 그 시간들이 쌓여 이제는 높이뛰기를 해도 좋을 만큼 튼튼한 근육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코로나에 발목을 붙잡혔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올 연말이면 "코로나가 사라졌다, 드디어 하늘이 열렸다"며 축포를 쏘아 올리고 고대하던 순례길에 오르게 될지요. 


종교의 의무를 지키거나 유적지를 찾아 예배드리는 행위 순례.... 구도자가 성지를 순례하듯 찾아다니며 발로 쓰신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이미 순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순례를 위해 성지를 찾아가는 일은 분명 뜻깊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지를 찾아가지 않아도 매일의 삶을 순례의 여정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한 순례자일 테니까요.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를 만나 음악이라는 순례길에 발을 들여놓았고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들으며 떠나지 않고도 순례자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러를 들으며 위로받았고 "터프한 첼로의 활시위는 마치 노련한 검객이 한을 품은 비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는 로스트로포비치 비검의 맛도 보았습니다. 기도의 힘만으로 넘을 수 없을 때 친구가 되어 준 바그너와 베르디가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박종호 선생님!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것이 오페라요 인생이라시며  "오페라하우스는 오른쪽에  (tragedie),  왼쪽에 코미디(comedie ) 이 두 단어로 우리의 인생을 관조하듯 서 있었다."라고 회고하셨지요.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오페라를 보고,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삶 속에서 누군가 표현한 '미친년 널뛰듯 감정의 기복을 뛴다'는 갱년기도 겨우내 비가 내리는 밴쿠버의 우요일도 축축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잘 익은 와인처럼 향기롭고 베를린 필, 현악기처럼 풍성한 내 생의 현을 조율해 주신 고마운 선생님! 아무리 뒤져봐도 가진 거라곤 편지지 몇 장과 한 자루 목필밖에 없습니다. 그중 한 장을 꺼내어 청록빛 바닷물로 채색하고 존경과 감사가 꽃말인 백장미 꽃물을 찍어 편지를 씁니다. 부디 수취인 불명으로 돌려보내진 마십시오.   


 PS :   갓 볶은 원두를 갈아 내린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커피, 향기와 함께 동봉합니다.


(이글은 2022년 5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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