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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우체통]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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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4-01 07:09 조회1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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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예쁩니다. 키도 크고요. 아는 것도 많고 힘도 셉니다. 게다가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예지력까지 갖추었습니다. 무엇보다 깊고 오묘한 눈매와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풍성하고 매혹적인 머리카락은 나의 자존심이요 집안의 자랑입니다. 옛날 같으면 책받침 여인, 지금은 남자들의 핀업걸(Pin-up girl) 1위를 놓친 적이 없고 여자들조차 내 사진을 셀폰에 저장하고 다니지요. 그것도 모자라 이젠 내 이름까지 탐내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좀 예쁘긴 예쁜가 봅니다. 


이렇게 탁월한 미모와 능력을 제게 주신 아버지! 

우연히 한 여자 아이의 셀폰을 보았습니다. 정말이지 그건 우연이었어요. 식탁 위의 셀폰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진동하더군요. 발신자 이름을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전화를 했나 봐요. 셀폰도 없고 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전화를 한 기억이 없는데 말입니다. 나이는 못 속인다는 어르신들 말씀처럼 치매가 온 건지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는지 살짝 당황하던 순간, 여자아이가 전화를 받더군요. "엄마? 언제 퇴근하세요?" 하는데, 아연실색했습니다. 내 기억으로 남편과 나 사이엔 자식이라곤 딸 하나가 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딸이 또 있었었다니요. 정말 내가 치매라도 걸린 걸까요? 


아닙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잠시 충격으로 제 예지력에 문제가 발생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린 나는 이 여자아이가 허락도 없이 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눈동자 색도 다르고, 긴 머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나처럼 금발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그렇다고 힘이 세거나 아는 게 많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갈라드리엘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요? 아이의 셀폰을 열어보았습니다.  가관이더군요. 엄마는 갈라드리엘, 아빠는 호빗 마을 정원사 "샘" 하나뿐인 여동생은 내 손녀딸 "아르웬" 삼촌 이름은 내 남편 이름 "캘레보른"을 주었고, 이모 중 한 사람은"에오윈"이었어요. 세상에나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더군요. 그나마 이모부의 이름은 에오윈의 남편인 "파라미르"였으니, 그나마 이 집안 내력을 들여다볼 마음이 생긴 거지요. 깨물어 안 아프고 안 귀한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자식들 중 가장 큰 애정과 관심을 받은 자식이 저였으니 제가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해야 도리가 아니겠는지요.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세상 "반지의 제왕"에서 "평화롭고 욕심 없는 삶의 소중함"을 그리고 싶었던 당신의 의도를 무참히 짓밟고 막장 집안으로 만들어 버린 이 아이의 작명(作名) 배경을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빛바래지 않는 황금빛 숲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제 이름을 가진 아이 엄마는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졌더군요. 40년 넘게 고수해 온 검고 긴 머리칼은 빛나는 황금빛은 아니지만 아직 봐 줄만 했습니다. 밥하는 일보다 나무 기르는데 더 정성인 이 여자의 집 안은 크고 작은 화초들로 가정집 인지 화원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대문 옆에는 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에 "로스로리엔"이라 쓴 당호(堂號)를 걸고 황금 숲의 여주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더군요. 처음엔 딸아이가 지어준 이름에 부담감을 느끼는가 싶더니만 지금은 당연한 듯 즐기는 분위기입니다. 아버지도 기억하시죠? 백부 페아노르가 세 번이나 부탁을 했을 때도 거절했던 제 머리카락을  반지원정대 중 한 사람, 김리에게는 세 가닥이나 선물한 것을요. 가진 건 없어도 춥다는 사람에겐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주는 여자,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자신의 밥을 덜어주는 걸 기쁨으로 알더 군요. 하여, 이 한 가지 이유로 미모도 떨어지고 많이 무식하지만 제 이름 "갈라드리엘"을 허락하였습니다.


다음은 반지 운반을 자처한 프로도의 충성스러운 하인이요 동반자였던 "샘"의 이름을 받은 아빠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샘은 간달프나 아라곤처럼 대단한 능력이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인물도 아닌 평범하고 순박한 정원사였지요. 얼떨결에 동참한 반지원정대 대원이었지만 시작이야 어찌 됐든 위험천만의 여정에서 끝까지 프로도를 도와 절대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완수합니다. 샘처럼 순박하고 평범하면서도 올곧은 아빠는 가족을 위해 아내를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 하는 충직한 가장입니다. "샘"처럼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아빠는 위기와 유혹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낸 이름 없는 영웅이지요. 샘 없이 프로도가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듯 이 집안엔 아빠 없이는 불가능했던 평화가 흐르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등짐을 메고 프로도를 지키고 따르던 샘, 탈진한 프로도를 등에 메고 운명의 산을 오르던 "샘"처럼 묵묵히 걷고 있는 가장의 목에, 나도 충직하고 아름다운 이름 "샘"을 걸어 주었습니다.


이런 충직한 아빠와 결혼하는 것이 어릴 적 꿈이던"아르웬"이라 저장된 여동생을 찾아봤습니다. 아르웬은 치료를 위해 칼에 찔린 프로도를 자신의 아버지 엘론드에게 데려갈 때 나즈굴의 추격을 받았지요. 계곡을 건널 때 계곡을 향해 마법의 주문을 읊조립니다. 순간, 백마의 형상을 한 수천 톤의 계곡물이 쏟아져 나와 나즈굴 일당을 수장시켜버립니다. 위기의 순간 주문을 외워 프로도와 자신을 구해 내듯, 엄마 어깨가 무릎까지 내려왔을 때 "엄마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며 지구라도 업고 날 것 같은 커다란 날개를 달아주었지요. 비즈니스 실패 후, 빈손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그래도 아빠는 나의 영웅"이라며 초등학교때부터 모은 돈을 페니한개 빼지 않고 모두 쥐어 주었습니다. 그 돈을 받은 아빠는 "이 돈을 어찌 받아"하며 고개를 떨구었지요. 그런 아빠를 안아주던 여동생에게 언니는 요정의 나라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이름 "아르웬"을 달아 주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로 주문을 거는 아이, 엄마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고 아빠의 심장에 뜨거운 피를 수혈한 아이, 그 이름을 받아 마땅한 아이였습니다. 나는 이 아이의 머리 위에 내 손녀 이름"아르웬"과 함께 내 황금빛 머리카락을 뽑아 만든 화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아버지! 

폭설로 몸살을 앓던 밴쿠버에도 봄이 왔습니다. 소박한 엄마의 정원을 가꾸는 충직한 아빠가 있고, 영원한 엄마 아빠의 치어리더라는 아름다운 요정이 사는 숲 "로스로리엔"에도 봄이 왔습니다. 지난겨울 여주인이 잘라준 올리브나무 가지 옆으로 새 가지가 두 개나 뻗어 나왔네요. 가지 끝마다 새로 돋아난 연둣빛 고운 잎들이 창을 열고 들어온 바람에 춤을 춥니다.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고 철새들이 돌아오는 봄, 커다란 날개를 펼쳐 나르는 거대한 독수리를 이 아이에게서 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고 가는 철새가 아닌 사시사철 떠나지 않고 숲을 지키는 독수리 말입니다. 간달프를 구하고 프로도를 구하고 마지막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던 새, 위기의 순간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와 영웅들을 구했던 지혜롭고 위대한 독수리 "과이히르"를요.


지금 당장의 이익이나 가치보다 멀리 내다보고 길을 제시하는 아이, 언제나 솔선수범해서 교통정리를 했고 이제는 망루에 올라앉아 파수꾼이 된 큰 딸.....  과이히르가 날아올 때면 희망을 바라보던 독자들처럼 나도 비상하는 아이의 날갯짓에서 희망을 봅니다. 타국의 삶은 아이들에게도 부모 못지않게 험하고 가파른 언덕이었습니다.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은 아니고 캐내디언이듯 캐네디언도 아닌 "바나나"로 흔들리던 아이들이 이제는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까짓 이름 아니라 내 머리카락 전부라도 뽑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철새처럼 오 가지도, 참새처럼 재재 거리지도 않는 변함없고 지혜로운 작명가 딸에게 나는 위대한 이름 "과이히르"를 선물했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아버지! "반지의 제왕"에서 당신이 의도하셨던 건"평화롭고 욕심 없는 삶의 소중함"이었습니다. 당신의 의도처럼 욕심 없고 충실한 삶을 지어가는 이들 이민 원정대가 끝까지 자신들의 소명을 살아 내도록 그들의 여정을 지키고 보호하실 거라 믿으며 오늘은 이만 접습니다.


2022년 3월 5일 나의 아버지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께,  갈라드리엘 드림


*이 글은 반지의 제왕중 황금숲의 요정 갈라드리엘의 시선으로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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