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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여름방학에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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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6-19 08:23 조회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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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인/시인. 수필가(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회원) 

 

바야흐로 시원한 소나기 한 줄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 몇 주 후면 모든 학생들은 방학에 들어갈 것이고 아침마다 소란스럽던 부모와 아이들은 느긋한 아침 시간을 맞이할 터였다. 작년 가을 딸아이가 대학생인 된 터라 나는 일찌감치 조용하고 여유로운 나만의 아침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산 중 절간이 따로 없었다. 나는 모처럼만에 찾아온 정갈한 아침 기운을 받으며 머리를 맑게 한다는 민들레꽃차를 만들었다. 서서히 은은한 향을 내며 연한 노란빛으로 우러나는 찻물을 바라 보다 딸과 같은 나이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 맞이했던 새내기 여름 방학을 떠올렸다.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찰나, 초록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신록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렀고 하늘엔 갖가지 형상을 한 조각 구름들이 널려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재밌고 신나게만 느껴졌던 것은 마음에  들어찬 새파란 청춘의 강이 언제나 넘실거렸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방학동안 무엇을 할까 마루에 누워 딩굴거리다 과의 모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어떨까 싶은 도발적인 생각이 들었다. 삼십여 년 전만해도 서울에는 남여공학인 학교가 거의 없었다. 여학교만 육 년을 다니다 대학에 입학해 같은 과의 남학생들을 보며 무척 신기해했다. 생물학적으로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진 이들이 우글거리는 그 곳은 풋풋한 매력이 가득찬 정글이었다. 식품과 관련된 학과라 거의가 여학생일거라는 나의 예상을 뒤엎고 아홉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남학생이었다. 어느 여학생은 남학생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너무 흥분이 되어 도대체 결석을 할 수가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사실 나는 그다지 이성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고 사심없이 휴머니즘을 발휘한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과의 모든 아이들에게 편지를 하기로 마음먹고 문방구로 달려가 편지지를 한아름 샀다. 학과 교수님들까지 포함시키니 사십 칠 명 분의 봉투와 우표가 필요했다. 알뜰히 모았던 용돈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한창 인기였던 꽃편지지 대신 가로로 줄이 좍좍 그어진 일반 편지지를 선택했다. 연애할 때나 쓰던 꽃 편지지로 괜한 오해의 소지를 살 필요가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절감이 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기운차게 편지쓰기를 시작한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코를 석자나 빠뜨린 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겨우 한 학기가 끝난 마당에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전혀 다른 내용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끈적이며 달라붙는 습한 기운은 전신을 휘감고 도대체 나에 대한 감정을 알 길 없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일은 마치 처음 출가하여 탁발하러 초행길을 나선 스님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여름에 편지를 써야 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나 겨우 어찌어찌해서 열 통의 편지를 작성하고는 그 이유도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당시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오십 명에 가까운 이들에게 편지라는 창작연습을 통하여 내가 가진 문학에 대한 열정과 능력을 자체 검증하는 시간이 되리라 굳게 믿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통틀어 가장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일이 심각하면서도 왠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따분하기 짝이 없는 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열 명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부쳐 버려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편지를 부쳐야만 했다. 만약 아이들 전부에게 편지를 하질 않는다면 나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꼴이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새롭게 순서를 정했다. 어찌되었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내가 세운 계획을 포기하기 싫었고 어떻게든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마지막 편지를 부치는 것이 최종 목표였고 실제로 개강 일주일을 남겨두고 마지막 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참으로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뿌듯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편지 쓰기의 결과는 상상 이상을 초월하였다. 

개강 첫 날,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놀라웠다. 그들은 달라진 태도로 호의를 갖고 나를 대하였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편지를 한 줄 알고 심각한 착각을 하기도 했지만 졸업 때까지 유쾌하게 서로 친구가 되어 지낼 수 있었다.    

편지를 쓰는 일은 개개인간의 은밀한 감정이 소통되는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이다.  내면에 잠재한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내어 상대방과 진심을 교류할 수 있다. 엄청난 문명의 이기로 말미암아 편지 쓰는 일이 사라진 것은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다.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내뱉으면 모래위에 쏟아버린 물과 같아서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채로 사람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하물며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더할 나위 없이 상대방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심을 담아 전달한다. 편지는 직접 상대방과 주고받으며 말한 것 이상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보물이 된다. 책상 안쪽 서랍에 오래된 친구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여름에 어느 누군가에게 나의 진심을 담은 편지를 써 보는 것은 어떨런지, 세월이 흘러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 편지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보물로 소중하게 간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5:25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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