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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특별기고] 아름다운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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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2-21 11:44 조회3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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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1.5세대와 2세대, 한인 사회의 희망

 

 

을미년도 막 달음이다. 곧 겨울이겠구나 하는 쓸쓸함은 11월에 다 느꼈다. 12월은 한 해를 마감하는 모임에 바쁘다. 여섯 해째 봉사하는 밴쿠버 한인노인회 송년회도 어김없이 치렀다. 항상 그랬듯이 일찌감치 12월 첫째 토요일에. 밀려드는 다른 송년회와 중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예순다섯이니 이제 노인이라는 느낌이 좀 든다. 2009년 노인회에 발 디딜 때 내 나이 쉰아홉. 그때는 몸보다 마음이 너무 젊었다. 다만 가진 재능을 써보겠다는 생각이었지, 노인이기 때문에 회원이 된다는 생각은 없었다. 재무이사로 시작하였지만, 당시 노인회 임원과 이사진의 평균년령은 70대 중반 정도. 나는 소위 '영계'라도 한참이었다.

 

노인회 연중행사는 다양했다. 2월의 '구정 잔치', 3월의 '정기총회', 5월의 '어버이날', 6월의 '단오절', 9월의 '추석 잔치', 12월의 '송년회', 그리고 4월부터 6월까지는 상반기, 9월부터 11월까지는 하반기 노인대학 강좌가 있었다.

 

그 많은 행사준비에는 일손이 필요하다. 헤이스팅스의 회관 대강당에 행사현수막을 설치하고,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고, 마이크장치를 세팅하고, 접수하고, 음식 준비하고, 행사 후 정리정돈과 청소, 이런 일들에 참여하는 일손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걸음걸이도 느리고, 근력도 옛 만 못한 분들이 잔치 준비하듯 며칠 전부터 회관에 나와서 이런저런 행사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가끔 무슨 여성회 회원들이 도와주긴 했지만 지속하지는 않았다. 구정 잔치와 단오절은 전통적으로 U 대학과 S 대학 한인 학생모임에서 주관했지만 그나마 2년 전부터는 못하겠다는 통보를 했다. 학업이 바쁘고 부업이 바쁠 수도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밴쿠버 젊은 층의 경로사상이 선배들만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올해 송년회는 여덟 명의 젊은이들이 자원봉사를 왔다.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붉은 산타 고깔을 쓰고 행사장 안내하랴, 음식준비 도우랴, 책걸상 정리하랴, 청소하랴, 설거지하랴 바쁘게 움직였다. 행사 뒷정리가 후다닥 끝났다. 젊은 힘이 부러웠다.

 

버나비 주민회관(Burnaby Neighborhood House) 시니어 모임에 내가 홍보대사로 봉사하고 있는데 행사가 있으면 항상 젊은이들이 힘쓰는 일을 다 해준다. 중학생들도 와서 봉사한다. 봉사증(Certification of Volunteer)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이웃의 노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다. 캐나다 정부에 노인 관련 후원금(Grant)신청을 하려면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한데 제일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젊은 세대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다. 노인층은 젊은이들을 아끼고, 젊은 층은 노인층을 이해하라는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그래야 사회는 건전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영어는 존댓말이 없어서인지 처음 캐나다에 와서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때 좀 기분이 나쁜 적이 있었다. 성인반 고등학교 과정에서 일이다. 스무 살 초, 중반의 동급생들이 자꾸 '원배', '원배'하고 감히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길래 건방진 느낌이 들어 '데이비드'라는 영어 이름을 하나 만들었다.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이야기하며 가끔 어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그들과의 대화법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서로를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격의 없음이 이제는 편해졌다. 나보다 나이 많은 연령층들과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허물없어진다.

 

한국인들 끼리는 우선 나이 적고 많음을 파악해야 편하다. 물론 나이 적다고 성인들끼리 함부로 하대할 수는 없으나, 나이 많으면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예의 바른 사람으로 통한다. 그러니 동년배나 비슷한 연령대가 아니면 감히 친구라고 칭할 수 없다.

 

그래서 한인 커뮤니티 자원봉사는 가끔 젊은이들을 실망하게 한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반말을 서슴지 않고, 때로는 하인 부리듯 일을 시킨다. 개인 신상을 물어보고는 '너희 부모를 꼬마 때부터 내가 잘 안다. 철딱서니 없더니 너희 같은 자식을 다 두었구나!' 운운한다. 그리고는 젊은이들의 방식은 무시해 버리고 자기 뜻대로 하려 든다. 좋은 마음으로 자원봉사 나왔던 젊은이들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놓고는 요즘 젊은이들은 '경로사상'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노인회 송년회에 온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무척 아름답다. 밝고 환한 그들의 표정이 세월의 뒤안길에 선 노인들의 황혼길을 비춘다. 그들은 노인들을 보면서 한국에 있거나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렸을 터이고, 노인들은 이국땅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보람찬 내일을 꿈꾸는 손주들을 떠올렸을 터이다. 함께 어울려 흘리는 땀이 한인사회를 정화한다.

 

누가 밴쿠버 한인사회를 '흙탕물'이라고 했던가. 한인사회 행사에 참여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만나면 술 한잔에 곁들이는 오징어 안주처럼 심심풀이로 한인사회를 혹평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봉사하는 젊은이들이 있기에 내일이 희망차다. 교민사회에 '다 같이, 함께 걸어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질수록 흙탕물은 좀 더 빨리 '정화수'로 변할 것이다.

 

"다음 행사에 또 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세요" 씩씩하고 밝게 인사하며 가는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볼 때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언제 흙탕물을 벗어나나 생각만 했지 꾸준히 정화하려는 노력은 충분했던가? 세월이 흘러 젊은이들이 우리 나이가 될 때, 노인회를 찾으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그때 열심히 일했던 어르신들 덕택에 오늘날 우리가 좋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어라고 할 까? 아니면 맨날 싸움질만 하더니 있던 유산 다 날려먹고 한인사회와 증오와 불신만 심어주었어라고 할 까? 두려워진다.

 

아름다운 청년들이 밴쿠버 교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하겠다. 고인 물은 썩는다. 부지런히 물꼬를 터서 후일 노년의 물줄기를 따라오는 후세들에게 부끄럼 없도록 해야겠다. 송구영신. 옛것 보내고 새것 맞이하는 즈음에 공인노인 자격증(?)을 받은 새내기 노인이 단단히 각오해 본다. 

 

이원배(밴쿠버 한인 노인회 재무이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5:25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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