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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우아한 비행] 남 하는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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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세익기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7-20 12:22 조회4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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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 모습에서 떠 오른 내 과거, 지금은 공감과 배려의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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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늦은 오후 거대한 쇼핑몰에서 두어 시간을 돌아다니다 건물 밖으로 나올 때였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고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소리는 없었다. 아까만 해도 비 올 기미조차 없었는데 무슨 비람. 지나가는 사람 모두 우산을 쓰고 있다. 비가 오는지 어찌 알았을까. 우산 없는 이는 딱 나 하나다. 마치 나를 빼고 모든 세상은 비가 올 것을 알았던 것처럼.

 

문득 캐나다에서의 첫 대학 생활이 떠올랐다. 늘 나만 모르는 것 같았다. 범위도 상당하고 분량도 만만치 않은 시험에 모두가 답을 쓱쓱 쓰고 나갔다. 끙끙 문제를 붙들고 있어도 채워지지 않던 시험지의 공백은 그간의 노력을 무색하게 했다. 예상치 못한 시험 문제였다. 그룹 토론을 할 때도 할 말이 통 생각나지 않았다. 벙어리처럼 앉아 있곤 했다. 모둠 프로젝트에서 한 이란 친구의 이름이 통보 없이 빠진 걸 보며 나 역시 그리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있었다. 지금도 악몽을 꿀 때면 그 시절이 나온다. '하고 싶은 일'과 '공부'는 늘 영어라는 걸림돌에 걸렸다. 다른 사람보다 오래 걸려 꾸역꾸역 과정을 끝냈다. 패배감에 젖은 초라한 대학시절이었다.

 

그런 내가 영어 선생이 되었다. 얼마 전 공개 수업을 했다. 영어 질문에 술술 대답하는 다른 학생에 비해 부족해 보이는 현서의 어머님이 나중에 찾아왔다. '현서에게 관심이 없는 것 아니냐'며 섭섭함을 토로하신다. “제가 현서 같았어요.” 내 첫 마디였다. 한국 와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타고난 성격과 기질 탓에 속도가 느린 아이들을 절대 놓치지 말겠다 맘 먹었다. 그 다짐을 갖게 한 캐나다 학창 시절을 말하며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데, 어머님이 우신다. 같이 울었다. 현서를 기다려 주고 싶었는데, 혹 무심함으로 보여진 대목은 용서를 구했다.

 

한국의 교육 분위기에선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가 어렵다. 많은 대안을 제시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적성, 관심, 역량과 관계없이 ‘남 하는 만큼’이 기준이다. 다른 아이들과 현서를 비교하며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어머님의 지론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 ‘남 하는 만큼’ 하는 것은 어디에 살든 우리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캐나다에서도 ‘남 하는 만큼’ 영어가 되지 않아 좌절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동요제에 나가 상을 탄 4학년 지원이가 있다. 영어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한국말 노래’를 시켰다. 영어를 ‘잘’ 못하는 지원이다. 그 목소리가 곱고, 가사가 사랑스러워 웃음이 났다. 노래도 영어로만, 한마디라도 영어로 말해야 하는, 작은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고운 모습을 포기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만의 색깔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다. 

 

여의도 쇼핑몰을 나와 빽빽한 빌딩 숲 사이를 걸으며 유유히 비를 맞았다. 제법 많은 비를 맞으며 늘 뒤쳐지고 초라했던 시절을 돌아봤다. 당시엔 괴롭고 외로웠지만 그 아픔 덕에 ‘남 하는 만큼’ 못하는 이들에게 공감과 관심을 품게 되었다. 조금은 깊은 삶과 사유를 갖게 되었다. 그래, 지금은 나도 이렇게 제 색깔을 반짝이며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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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5:25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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