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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적어(赤魚)가 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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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1-28 08:27 조회3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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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양사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빠르게 지나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 늦게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무언가를 하고는 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을 뻔히 보고도 붙잡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아꼈다. 

이십 대 청춘이 가진 최고의 선물인 젊음과 열정을 지닌 채 사회 초년병으로서 매일 맞닥뜨리는 다양한 삶이 너무나 신기하였고 감동 그 자체였다. 그 당시 나는 삶의 여러가지 매력적인 모습에 흠뻑 빠져 있었다.

잠실에 위치한 교통회관 구내 식당에서 책임 영양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 날도 여지없이 교육을 받으러 온 교육생들이 800여 명 이상을 웃돌았다. 교통회관 측에서 일주일 전에 교육생을 접수받아 구내식당에 미리 인원을 통보해주기 때문에 예상식수를 파악할 수 있지만 간혹 교육생들이 외부인과의 식사를 구내 식당에서 하는 까닭에 준비한 음식이 모자를 때가 있었다. 그러한 일은 이따금 겪어왔던 터라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당황하고 안타까운 순간이 있기 마련인 것을 나는 비로소 그 사건을 통하여 절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때는 1993년 여름, 절기상으로 말복(末伏)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의 주메뉴는 ‘적어(赤魚)양념구이’였다.

‘붉은 생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선을 통째로 튀겨 달달한 고추장 소스를 뿌려내는 메뉴였는데 장정이 세 명이나 달려들어 아침부터 쉬지않고 계속 튀겨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구름처럼 밀려드는 교육생을 미처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주메뉴로 어김없이 한 마리씩의 생선을 배식해야만 했기 때문에 식수인원에 맞게 생선을 튀겨내야만 했다. 그나마 생선의 단가가 싸서 확보해둘 요량으로 넉넉히 생선을 주문해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느 새 한 손에 식권을 들고 늘어선 줄이 삼심 미터를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조용히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교육생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제각각이었다. 바닥에 자리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신이나서 키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시장통을 연상시켰다. 

가뜩이나 음식이 제시간에 나오질 않아 마음졸이며 좌불안석으로 연신 들락거리던 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흰 가운 차림의 젊은 아가씨가 앞으로 나서자 그들 나름대로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적어(赤魚)가 너무 커서 튀겨지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여기까지 말하는데 숨이 차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덧붙여서 설명을 하려하자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에끼, 여보슈! 아가씨가 거짓말도 잘하는구먼! 적어가 어떻게 크단 말이유. 적어는 적어야 말이 되지. 아, 안 그래유? 여러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모든 이들이 한 마디씩 하며 박수를 치고 왁자지껄 웃어댔다. 

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보기 민망할 정도로 물들었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수가 없어 한달음에 도망치듯 사무실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의 실수는 원재료의 단가가 무조건 싸다고 해서 너무 큰 사이즈의 생선을 주문한 것이었고 또 그것을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불앞에서 튀겨내야 하는 비능률적인 식단을 구성한 것이었다. 

열정만 앞선 나는 단체급식에 있어서 영양적인 식단구성과 아울러 조화롭고 능률적인 배식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참으로 한심하고도 또 한심한 영양사였다.

그 이후로 재직시절 내내 다시는 같은 메뉴를 쓰지 않았다. 그래도 그 현명한 아저씨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짜증내지 않고 기다려주어서 무사히 점심시간을 끝마칠 수 있었다. 

배식 시간이 끝나고 우리 주방 식구들은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덕담을 해가며 테이블 가득 올려진 ‘적어(赤魚)양념구이’를 양 볼대기 가득 우물거리며 만찬을 즐겼다.      

정숙인 (시인, 수필가,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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