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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35. 무의식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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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09 13:19 조회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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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였으면 좋을 뻔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사랑이며 낭만, 순수며 에술 등 달콤한 단어들을 사탕처럼 물고, 햇살 좋은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으련만. 어쩌다가 이리 칙칙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링거줄을 매달고 팔이나 다리 한 짝씩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환자들이 사체처럼 누워있는 응급실을 휘 둘러보았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발갛게 적셔가는 붕대와 가끔씩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통해서였다. 조도 낮은 불빛 아래 벽마저 희다 못해 파리했다. 자유와 생명이 담보로 잡힌 사람들 속에 왜 팔다리 멀쩡한 그네가 끼여 있는지 좀처럼 이해가 안 되었다.

때마침 파란 가운 입은 사람이 긴 그림자를 끌고 들어왔다.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반가워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핑그르르 천장이 돌았다. 큰 파도에 휩쓸린 돛단배처럼 몸이 천장까지 솟구쳤다가 내동댕이쳐지는 게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듯 속이 울렁거렸다. 파란 가운은 그네의 멀미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없이 게으른 걸음으로 침상 사이를 누비며 다녔다. 그가 다가왔을 때에는 이미 그네의 울렁증이 가라앉은  후였다. 파란 가운은 검시관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네 눈속을 꼬마 손전등으로 비춰보기도 하고 맥을 짚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진땀이 송글송글난 그네의 이마나 하얗게 질린 안색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선생님, 왜 이렇게 메스껍죠?”

차트에만 꽂혀있던 눈길이 그네에게 옮겨왔다. 사막처럼 공허한 눈길이었다.

“차트에‘일과성 의식상실’이라고 적혀 있네요. 날이 밝는 대로 정밀검사를 해봅시다. 뇌 손상이 의심되니. 그런데 가만히 누워있지 왜 그리 나대요?”

파란 가운이 모래알 서걱거리는 목소리로 아이 나무라듯 했다. 무렴해진 그네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선생님께 뭘 좀 여쭤 보려고 한 건데… . 뇌 손상이라뇨?  울렁거리는 것만 빼면 멀쩡한데. 가끔 이러다 말아요. 정말요. 근데 제가 왜  여기 있어요? 다친 사람들이 여기 왜 이렇게 많아요? 간밤에 무슨 사고라도 있었던 거예요? ”

“당신하고 같이 실려온 사람들인데, 전혀 기억이 안 나요? 해리성 단기기억상실증인가? 생각보다 심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지막 말을 흐리는 게 영 기분이 나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벌레가 뇌세포를 사각사각 파먹는 것 같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게. 사람 마음이 참 얍삽했다. 한두 번 쓰러질 땐 단순한 피곤증세라고 가볍게 여겼는데, 의사 입에서 ‘뇌 손상, 해리성 단기기억상실증’ 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슬슬 간이 졸아들었다. 

조금 멍하기만 하던 머리가 바이러스 감염된 듯 기억 회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파란 가운이 잔뜩 겁 집어먹은 그네에게

“별 거 아닐 수도 있구요. 오늘밤 푹 자야하니 두통이 심하면 간호사에게 진통제나 수면제를 달래서 먹어요.”선심쓰듯 말하고 갔다. 

자신의 말 한 마디가 환자에게 그대로 사망 선고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함부로 던지는 의사의 언어 폭력에 화가 치밀었다.

뭐야.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럼 그런 말은 왜 해? 넌 지금 엔진이 고장난 자동차야. 금방 폐기처분될 거야! 선언해놓고 아님 말고야?  너 같음 이 상황에서 잠이 오겠냐? 순돌팔이 같으니. 씩씩 불며 응급실을 휘 둘러보았다. 바닥을 기어다니던 절망이 그네의 울분을 타고 슬금슬금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환자들이 옆구리에 죽음의 폭약주머니 하나씩을 차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응급실 뿐이겠는가. 병원마다 그득차 있는 환자들, 거리를 헤매는 중생 모두  죽음의 도깨비에게 조롱당하며 사는 걸. 삶의 종착역은 죽음이요, 죽음이 삶의 동반자인 것을.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값지고 더욱 찬란한 것을… .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을 보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의 가치를 아는 아이러니를 깨달으며 한결 마음이 편해진 그네 눈에 비로소 주변이 보였다. 옆침상에 시트를 둘둘 말고있는 환자의 기럭지가 제법 길어 보였다. 그리고 사물함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안경과 벽에 기대어 서있는 하얀 지팡이. 참 묘한 무대장치였다. 생과 사가, 희와 비가 엇갈리는 응급실 배경에 극명한 흑백 대비의 소품 한 쌍이라니.

내일 아침이면 운명의 여신이 무작위로 집어주는 병고와 생활의 어느 한 지팡이를 받아야 했다. 그네에겐 선택의 기회도 없고 또한 거부할 권리도 없었다. 그네의 노력과 애태움 따위가 전혀 끼어들 틈 없는 완전 무중력상태가 오히려 그네를 체념케 했다.

그래, '돌팔이 의사 말처럼 편안히 잠이나 자자'하고 눈을 감았지만 의식은 갈수록 명징해졌다. 억지로 자려고 애쓰느니 사금파리처럼 깨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곁눈질해서 배워둔 할아버지의 단전호흡 자세를 흉내내 보았다.

가부좌를 틀고 가슴을 내민 채 손바닥을 펴서 천장을 향하게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천지의 기운이 포말이 되어 폐부를 거쳐 말단세포까지 방울방울 번져나갔다. 가슴이 터질듯 부풀어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았다. 뇌 속을 헤집고 다니던 사념과 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던 삿된 기운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공중부양이라도 할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유채색 의식의 강을 건너면 무채색 무의식의 바다에 다다른다. 너무나 깊고 무거워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망설인다. 한 번 빠지면 다시는 의식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 바다에 발을 적셔야 만나는 누군가가 있다. 토막난 기억의 필름일수도 있고 그네 자신일 수도 있다.

심호흡을 했다. 마치 바다에 들어가기 전 해녀가 깊고 긴 숨을 들이마시듯. 무의식의 바다는 하양, 티끌 하나 없는 청정 순백색이었다.
노오란 꽃잎 하나 날아든다. 노오란 꽃잎이 둘셋 여나믄 즈믄 송이로 늘어난다. 하늘하늘 군무를 춘다. 바다는 온통 노오란 꽃잎 세상이다. 꽃잎이 노오란 빛을 잃고 하나둘씩 가라앉는다. 꽃잎의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무의식의 바다는 꽃잎들의 무덤이 된다.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는 통곡이 되고, 무의식의 바다는 통곡의 바다가 된다.

그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만 볼트에 감전된 듯 펄떡펄떡 뛰는 그네를 흔드는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득히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이봐요. 어서 깨어나요. 그렇지 않으면 놈이 당신을 파괴하고 말 거요”에 눈을 퍼뜩 떴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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