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32. 소문의 벽 > 문학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문학

문학 | [비 온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32. 소문의 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7-29 13:37 조회405회 댓글0건

본문

와 이캅니꺼? 어르신. 홀딱 젖었구로. 

수다 떨던 아낙네들 머리 위로 물벼락이 쏟아졌다. 반공에 걸린 무지개 다리가 부서졌다. 고즈넉하던 수묵화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면서 난데없는 호통이 날아들었다.

“머, 정혼한 처자헌티 아를 뱄다고? 것도 저 늙다리 딴따라 아를? 주둥이 한 번 잘못 놀리믄 삼대가 빌어묵는지 아나 모르나? ”

카메라 렌즈에 호스를 붙잡고 물을 뿌리는 할머니가 잡혔다. 한 발이나 들어간 눈이 번뜩이는 게 꼭 신 들린 무당 같았다. 할머니의 저주를 듣고 아낙네들이 우박 맞은 메뚜기처럼 달아나는 바람에  잔뜩 독 오른 할머니와 카메라를 들고 서있던 그네가 어정쩡하게 맞딱드리게 되었다. 어김없이 그네에게 불벼락이 쏟아졌다.

“니는 저 잡것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나? 싸대기를 갈기지 않구로. 양코배기 사우도 남사스러븐데 늙다리 딴따라 사우까지 보게 생깄다꼬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구로. 참말로 얼굴을 들고 나댕길 수가 없대이. 간나들이 부모가 정해준 배필하고 조신하게 살믄 좀 좋나? 이놈의 집안은 암탉들이 꼬꼬댁거려 하루도 팬할 말이 없지비. 아이고, 내가 영감 앞서 갔어야 했지비.”

열두 발 상모마냥 늘어놓는 질책과 탄식을 온통 다 뒤집어쓴 그네가 얼음기둥처럼 서있었다. 소문의 벽이 너무 단단해서 어떤 변명으로도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보다 못한 큰오빠가 할머니 손에서 호스를 빼앗아 멀리 던지며 달랬다.

“할마이, 그기 아니랍니다. 내 소희한티 다 들었심다. 저 양반은.”
“양반은 무신 양반, 남의 초상집에 와서리 이리 난리분통을 맹근 작자를. 당장 내쫓아뿔고 대문간에 왕소금 뿌리라카이. ”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할머니를 큰오빠가 방에 모시고 들어갔다.
 
돌부처처럼 굳은 손님을 혼자 둘 수 없어 그네가 다가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분란이. 경황이 없어 제 소개도 아직 못했네요. 찬우 애빕니다. 오셨다는 소식 듣고 반가워서 앞뒤 사정도 살피지 않고 달려왔더니... .”

이제 보니 선량한 눈매와 방울이 달린 듯한 콧망울, 특히 부처님처럼 도톰하고 귓볼 축 늘어진 귀가 찬우와 꼭 닮았다.

“네, 찬우 아버님이시군요. 초상 뒤끝이라 모두들 예민해져 있어서요. 먼 길 오신 손님께 결례를… .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별 말씀을. 듣자 하니 찬우 누명을 벗겨 주고, 또 좋은 홈스테이 집도 소개해 주셨다구요. 정말 고맙습니다. 작은 성의니 받아 주십시오.”

신사가 내민 것은 와인색 리본으로 포장된 작은 상자와 봉투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찬우가 착하고 예뻐서 조금 거들었을 뿐인데요.”
“이 작은 성의마저 물리치시면 전 어떡합니까?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받아 주세요.”

선물을 주거니 밀치거니 한참 실랑이가 벌어졌다. 물벼락을 맞고도 호기심을 가누지 못해 기웃거리는 아낙네들 보기가 민망했다. 틀림없이 저희 짐작대로 사랑놀음을 하는 걸로 비칠 것 같았다. 제가 보고 싶은 대로, 제가 보고 싶은 것만, 제 깜냥만큼만 상상하는 게 보통 사람들이니까.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시골이라 마땅히 주무실 데도 없고, 또 마을사람들 이목도 좀… . 서울 올라가서 연락 드릴 게요. 아버님과 상의해야 할 게 있으니까요.”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찬우에 대해 그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지 않은가 싶었다. 찬우 엄마처럼 귀찮은 혹덩이를 돈꾸러미에 싸서 먼 우주로 던져놓고 편하게 살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돌연한 침입자가 끼어들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간섭을 하기 시작해 벌레 먹은 표정이 되었다고 판단한 그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도 그네 몸에서 쌩 하니 찬바람이 일었을 게다. 신사가 하릴없이 일어서며 명함 한 장을 건넸다.  

그네는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검은 승용차를 한참 바라보았다. 찬우가 눈물 어린 눈으로 몇 번이나 저 빤드르하게 이 흐르는 자동차를 배웅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찬우 눈에 푸른 강물이 출렁거리는 건 당연해 보였다. 누군들 이별이 좋을까마는 찬우는 이별이란 단어에 경기라도 일으킬듯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네의 한국행을 알고선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잇었다. 그네가 없는 동안 찬우의 마음 속에 얼마나 큰 풍랑이 일고 있을지… . 반려된 작은 성의에 쌩고랑해서 달아난 애아버지 대신 그네가 홀로 있을 찬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검은 승용차를 배웅하는 건 그네뿐이 아니었다. 재미난 소문거리를 염탐하는 파파라치들도 함께였다.
 
소문은 지네처럼 발이 많았다. 일어나 달리기 시작하면 사방팔방으로 재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돌아올 즈음엔 원작을 능가하는 극본으로 각색되어 돌아왔다. 어느 드라마 대본보다도 어느 영화 각본보다도 더 흥미진진했다. 늘상 얼굴 맞대고 있는 이웃이 주인공이고, 현실을 배경으로 쓰여지는 사실적 허구이니까. 소문이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그러면서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나?’하며 이죽거리며 소문에 한 입 보태고 한 다리 걸쳐 눈덩이처럼 굴렸다. 아무 악의없이 그냥 말하는 재미로. 소문이 전염병처럼 온 마을을 돌고 나면 한결 풀이 꺾여 시들해졌다. 그러면 사람들은 단물 빠진 껌처럼 씹다 뱉았다. 그런데 만약 소문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무릎맞춤을 한다든지 진상을 캐겠다고 나서면 사그라든 소문의 불씨가 되살아나 불멸의 신화처럼 회자되곤 했다.

 작은 마을에도 소문은 끊임없이 돌았다. 소문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면서도 소문을 귀고리처럼 달고 살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지루한 일상에 부는 산들바람만큼 신선했다. 서민 대부분이 그랬다. 단 체면으로 옷을 입고 영예로 관을 쓴 자들만 소문에 민감했다. 할머니가 엄마를 괴롭히던 진앙은 항상 소문이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행동가지가 음전치 못해 구설수에 휘말린다는 것이었다. 그냥 두면 가라앉을 종기를 긁고 헤집어서 탈을 내곤 하던 할머니였다.

그네는 짐을 주섬주섬 꾸렸다. 어차피 할아버지 장례 마치고 삼우제나 지내고 떠나려 했었다.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벌레잡이식물 같은 할머니에게 붙잡힐 가능성이 커졌다. 할머니는 끊임없는 잔소리가 가장 효과적인 훈육법인 줄 알았고, 누군가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인 줄 굳게 믿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셔서 빈 둥지에 때마침 날아온 도요새를 놓칠 리 없었다. 그네가 태어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서 훈장댁과 맺은 배냇혼약을 지키라 그네 등을 떼밀지도 모른다. ‘정혼한 처자’라는 말이 이미 시사했듯.
 
가출은 처음이 힘들지 두번째는 여행길 나서듯 가벼운 흥분까지 느끼는 여유가 생긴다. 아버지의 낡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집을 나섰다. 그네의 등뒤에서 피어날 음산한 소문들이 두렵지 않았다. 그네는 지켜야 할 체면도 없고 세우고 싶은 영예도 없었으므로.
 
가는 비가 뿌렸다. 카키색 사파리를 걸쳐 입은 그네 어깨에 송알송알 이슬이 맺혔다. 목에 건 카메라에 비가 들칠까 봐 후드를 썼다. 그리고 아득한 운무에 싸인 마을 앞바다를 넣고 샐카를 찍었다. 영낙없는 도망자였다. 그네는 씨익 웃었다. 비바람이 그네를 후려쳤다. 상쾌했다. 구속을 벗어던진 자유인의, 세속적 책임을 내려놓은 방랑자의 희열이 온 몸을 자릿짜릿하게 했다.
존재의 가벼야움! 그것이 연 감독 딸로서의 첫출발점이었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문학 목록

Total 557건 9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