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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 36. 블랙 레인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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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09 13:22 조회3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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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희망보다 절망이 더 달콤하다. 먼 산에 걸쳐진 무지개를 좇기보다 발치께에 드러누운, 검게 그을은 강둑에라도 기대고 싶은 게 보통사람들의 심리다.

깊고 침침한 무의식의 바다에 잠겨 있을 때 그네는 오히려 편안했다. 그러나 그 편안함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편안함은 정지요, 정지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그네가 그 편안함에 익숙해져 갈 때에 “놈이 당신을 집어 삼키기 전에…. 힘을 내요.”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 외침이 두레박처럼 무의식의 바다에 빠진 그네를 건져 올렸다.

땀에 흠씬 젖어있는 그네를 굽어보고 있는 건 한 남자였다. 그네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설재희였다. 아니 설재희의 탈을 쓴 낯선 남자였다. 희고 갸름한 설재희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이 사라진. 무척 낯익었던 것이 주는 생경함! 그것은 충격이었다. 충격을 넘어 경악이었다.

‘흡’ 그네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그네의 원망과 설움을 쏟아내기엔 그의 얼굴이 너무나 맑고 평온했다. 또한 세상 너머에 드리워진 그의 눈길을 거두어 들이기엔 그네의 사랑과 추억은 너무나 희미했다. 그가 오랜 세월 갈고 다듬은 정결과 청정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깨어났어요? 다행이예요.”

여전히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게 그네를 더 괴롭혔다. 눈길만큼 음성도 낯설었으면 미련의 끄나풀을 쉬 놓을 수 있으련만. 그네의 갈등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더듬더듬 제 침상으로 돌아갔다.

“아까 의사랑 하는 얘기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도 나처럼 해리성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무의식의 무덤에 묻어버리는. 하지만 영원히 묻히는 건 아니예요. 언젠가는 집채만큼 커져버린 무의식의 괴물이 당신을 집어 삼키는 순간이 오죠. 당신 스스로 그 괴물을 키우지 않았음 좋겠어요. 미안해요. 당신 일에 끼어 들어서.”

“당신도 해리성 장애가 있다구요? 그럼 당신의 어느 시절이 무의식의 바다에 묻혀 있나요?”

“모르겠어요. 나의 기억은 붉은 사막과  낙타 한 마리부터 시작해요. 용암처럼 들끓던 사막이 차츰 서늘해지면서 모래알이 서걱서걱 얼어가던 추위, 어젯밤 줄 묶여있던 기억 때문에 줄을 풀어줘도 달아날 줄 모르던 낙타, 그것이 나의 마지막이자 처음 떠오른 영상이오. 그 이후 다사로운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데도 끝내 찬란한 아침이 찾아오지 않았죠. 광명이 사라지고 빛깔도 사라진 광막한 암흑, 무지개마저도 블랙인 세상. 정직하게 말하면 난 아직도 무의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셈이지요. 우습죠? 그런 내가 당신에게 충고를 하는 게.”

“하지만 당신은 빛을 잃은 대신 또다른 세계에 눈을 떴잖아요. 영성의 세계랄까 초의식의 세계 같은… .”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일상이 너무나 그리워요. 누군가와 눈 맞추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근하고, 상사에게 지청구 들어가며 일하고, 퇴근 후 술 한 잔 걸치며 회포를 푸는…  아주 자잘한 일상 말이예요.”

“그게 뭐가 부러워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나날을 얼마나들 권태로워 하는데요.”

“남들에게는 권태로운 일상이 나에겐 은총이고 축복으로 보이니. 소중한 것은 놓치고 난 후 빛을 발한다. 참 아이러니칼하죠? ”

설재희, 과연 그가 맞나 싶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 자자분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과거와 육신의 눈을 잃은 대신 심안이 열리고 깨달음을 얻은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의 마음과 뇌리 속 어디에도 그네가 없다는 사실. 허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네가 더이상 그의 앞에서 음성을 속이고 그의 기억 한편을 다치지 않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니까. 그네는 도통한 철학자를 만나 얘기하듯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혹 아세요? 여기 있는 환자들과 제가 같이 실려 왔다는데?”

“후후,눈 뜬 사람이 눈 먼 소경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거요? 그럴 때도 있군요. 좋아요. 당신이 지우개로 싹 지워버린 불편한 진실을 들려주리다. 당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홍대 놀이터에서 비올라 소년과 팬파이프 합주? 아참, 클라식 음악과 사물놀이의 멋진 꼴라보 공연까지요.”

“아, 그래요? 나도 왜 그런 소동이 났는지 확실히는 몰라요. 그때 무대 뒤에서 시를 낭송하려고 대기 중이었거든요. 세월호 진상을 밝히라는 외침이 들리고 나서 얼마 안돼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더니 금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어요.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경찰이 투입되었나요? 불법 집회도 아니고 그냥 놀이판이었을 뿐인데?”

“아뇨. 소란이 난 한참 뒤에 출동한 경찰이 사태를 수습했는 걸요. 일상이 권태로운 누군가가  소요를 일으켰겠죠. 세월호 사건 때문에 가슴 가득 슬픔과 분노를 품고 있던 국민들 가슴이 ‘세월호’ 한 마디에 그만 뻥하고 터져 버렸을 수도 있구요. 시한폭탄처럼. 아참, 당신이 이 사람들하고 같이 여기 실려왔느냐고 물었죠? 소동이 일자 사람들이 우왕좌왕, 메뚜기떼처럼 멀려 다니며 넘어지고 자빠져 부상자들이 속출했지요. 아마 당신도 그 중 하나였을 거예요. 민한 나도 군중의 물결에 떠밀려 다니다 이렇게 되었으니까요.”

그가 목보호대를 톡톡 치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얼른 달려가는 마음을 잡아챈 그네가 예사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린 지금 불법시위꾼으로 몰려 여기 유치되어 있는 거예요? 아님 환자로 보호받고 있는 거예요?”

“글쎄, 영어(囹圄)의 몸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 농성 중이라오. 농성 중. 미디어가 입 다투어 말하길.  TV 채널마다 홍대앞 사건을 세월호 참사에 엮어 탑뉴스로 다루고 있어요. 지금 우린 아주 핫한 스타라오. 후후후. ”

그가 수사깡처럼 가늘고 흰 손가락을 들어 박쥐처럼 벽에 달라붙은 TV를 가리켰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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