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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 37. 잎새에 스치는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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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16 15:30 조회4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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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있는 벽걸이 TV에는 그가 말하는 ‘홍대 사건’이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었다. 

검정 옷을 입은 무법자가 설치고 다니고, 군중은 그를 피해 몰려 다니다가 서로 부딪고 다치는 장면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사회 부적응자의 난동 정도로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화면 밑에 깔린 ‘속보’라는 붉은 띠줄과 그 아래 빠르게 지나가는‘세월호 참사 시위 중 부상자 속출, 맹인시인 설재희 포함 천여 명 인근 병원에서 농성 중’이라는 고딕체 글씨가 극히 평범한 일을 아주 대형사건으로 잇슈화하고 있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촬영각도와 아나운서만 다를 뿐 같은 문구, 같은 장면들로 도배를 했다. 마치 보도자료를 뿌린 듯이.

 “아니, 저럴 수가 있어요? 달콤하고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 콘서트장을 살벌한 시위 현장으로 둔갑시키다니! 야, 대한민국 언론. 정말 대단해요. 완전 영화를 찍었구만, 영화를. 저기에 있었던 내가 봐도 진짜로 시위가 있었다고 믿겠네.”

그네가 손뼉을 짝짝 치며 미디어의 부정적인 위력을 갋아도 설재희는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그에게는 언론의 허구성이 새삼스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천재시인으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다가, 권력에 맞선 울분을 담은 시를 마치 시국시인 것처럼 해석해 권력의 철퇴를 맞게 해 침몰시켰고, 끝내는 사막에서 사라진 신기루로 만들어 존재까지도 소멸시켜 버린 언론의 폐해를 몸소 겪었던 그인지라 이 정도의 사기극에는 왼눈도 깜짝하지 않을 만큼 내성이 생겼을 법했다.

 “잠깐, 이제쯤이면 카메라가 엑스트라를 죽 훑다가 조연급에 비추고… 주인공에 앵글을 맞춰… 조금씩 당겨 클로즈업! 어때요? 드디어 남녀 주인공이 연막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요?”

담담하던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몸을 앞으로 내밀고 한껏 흥분된 음성으로 소리 소리지르며 그네의 주의를 끌었다.

“네? 주인공이요...?”

화면은 마술처럼 그의 지시를 따라 엑스트라를 훑고 소요의 중심무대와 공연자들을 비춘 후, 흰 지팡이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맹인을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그의 당황해하는 표정과 뒤뚱거리는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뒤좇았다. 마지막 카키색 자켓을 입은 사람과 부딪쳐 넘어지면서 그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자 추적자는 카키색 자켓이 떨어뜨린 앤틱카메라를 응시하고 암전이 되었다. 그가 또다시 언론에게 추적당하는 스틸러물에 그네까지 본의아니게 우정 출연을 한 셈이었다.

 “어~어, 딱 맞추었어요. 당신과 내가 주연이군요?  혹시 당신이 연출한 것 아녜요? “

“내가요? 감독이 주연하는 영화도 있어요? 아, 있다! 실버스타 스텔론과 톰 행크스. 하지만 아녜요. 내가 만들었으면 주인공을 좀더 근사한 캐릭터로 꾸미죠. 저렇게 찌질한 역할로 나오겠어요? 그리고 이런 스틸러물일수록 섹시한 여주인공을 캐스팅해야죠. 당신처럼 보이쉬한 여배우는 흥행이 안 돼요.”

 검지를 세우고 고개까지 흔들며 강하게 부인하는 그가 장난기 심한 소년처럼 보였다.

“그것 유감인데요? 저 나름 섹시한데… . 걱정 마세요. 제가 설재희 감독 취향이 아니듯 설 감독님도 제 스타일은 아니니까요. 후훗.”

‘설재희 시인이라면 몰라도’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웃음으로 뭉갰다.

“그런데 그때 낭송하려던 작품은 뭐예요? 혹시 시국 개탄시 이런거 아니었나요? 김지하 시인의 <오적>처럼. ”

“호, 날 그런 분에 비견하다니 영광인데요? 안타깝게도 난 수신(修身)도 못한 소인배라 현실참여시까지는 손도 못 댄다오. 이리 저리 걸리지 않을 순수시만. <낙타의 꿈>이라오. 낮 동안 매어있던 목줄의 기억 때문에 줄이 풀렸는데도 달아나지 못하고 밤새 나무 곁에 서있던 그 낙타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올가미처럼 걸고 헤집으며 나아가지 못하는 누군가와 꼭 닮았더라구요. 그래서 어두운 밤의 기억을 버리고 아침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본 것이라오.”

그는 안다, 그네가 누구인지.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네도 안다,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제 와서 아는 척해서 어쩔 것인가? 지금 눈앞에 있는 설재희는 그네를 한없이 설레게 하던 그가 아니며, 그네 역시 그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던 소녀가 아닌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낙타의 목줄처럼 영영 풀지 못하고 걸리적거리는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뿐.

한 세월의 강물을 흐르다보면 수많은 물줄기를 맞고 떠나보낸다. 누군가와는 잠시의 눈맞춤만으로, 누군가와는 손을 잡고 제법 오랜 시간을 동행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각기 제 갈 길을 따라 흘러가게 마련이다.

인연이 소중하나, 스치는 인연이 있고 머무는 인연이 있다. 정이 들었다 하여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늘어질 수는 없는 일. 때가 되면 인연의 끈을 놓아주어야 하고, 갈림길이 나오면 서로 등을 보이고 떠나야 한다. 
설재희는 그네의 잎새를 스치고 간 바람일 뿐. 그래, 이렇게 어릴 적 동무처럼, 시린 마음 하나도 없이 고게 물든 단풍잎처럼 추억의 갈피에 꽂아두는 거야. 볼 때마다 애틋하고 훈훈하게.

명상인 듯 수행인 듯 침묵에 빠져있는 그를 바라보는 그네의 눈길이 바람 잔 들녘처럼 평온하고 청랑했다.

그때까지 TV는 ‘세월호 사건일지’라는 제목으로 사건의 전모를 훑느라 분주했다. 잊고 싶은데 왜 자꾸 쑤석거리는 거지? 외면하고 싶은데 핏줄이 당기고 저려왔다. 
침몰 직전 손전화로 찍어보냈다는 동영상이 방영될 즈음, 병실 그득히 찬 환자들이 깨어나 제각기 한 마디씩 했다. 뾰족하게 날이 선 단어들이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헤집었다. 
선체가 기우뚱하면서 승객들의 공포가 치솟으면 TV 시청자도 그 공포를 체험했다. 점점 차오르는 물에 숨가빠하는 어린 목숨들과 갑판에 서있다가 내동댕이쳐지는 생명들이 TV 를 보고있는 이들의 눈 속으로 낙화처럼 졌다.
 
그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네가 무의식의 바다를 헤맬 때 꿈처럼 환시처럼 나타났던 노오란 꽃잎들의 군무… . 짓푸른 물결을 따라 소용돌이치던 민초들의 몸부림… .

세월의 강물을 살면서 허랑하게 흘려 보내야 할 것이 있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간혹 흘려야 할 것을 꼭 거머쥐고 있고, 놓아서는 안 될 것을 쉬 흘려 보내고 있진 않는지?

그네는 피멍든 꽃잎들의 아우성을 묘비명처럼 새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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