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중의 살아가는 이야기] 글쓰기에 대하여 > 문학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문학

문학 | [오석중의 살아가는 이야기] 글쓰기에 대하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nin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6-08 13:06 조회366회 댓글0건

본문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한다.

 

이 말은 내가 청소년에게 글쓰기와 책읽기를 할 때 권하는 방법이다.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권을 읽는 것 훨씬 쉬운 것처럼 한 페이지, 한 줄을 읽거나 쓴다는 일은 아주 쉽다. 단지 그것을 매일 해야 한다면 좀, 성가시기는 할 것이다.

 

나는 구두 수선을 29년 했다. 누가 나에게 구두를 몇 켤레를 고쳤냐고 묻는다면 하루에 열 켤레를 고쳤다고 가정하면 일 년 3천 개, 29년이면 8만 7천 개를 고친 게 된다.

 

많은 신발을 고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많은 숫자로 말할 수 있는 실적은 구두 말고도 참 많다.

 

책, 칫솔질, 자동차를 타고 다닌 거리, 등등 매일 생각 없이 했지만 어마어마한 숫자를 기록하는 일은 참 많다.

 

누구나 그렇게 매일 하다보면 쉽게 는다. 나 자신도 그렇게 해왔다. 하다 보니 참 좋고 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권하게 된다.

 

매일 메모하는 습관, 매일 한 줄이라도 읽는 습관, 나의 머리맡에는 항상 연필과 책이 있다. 자기 전에 5분이라도 읽거나 쓰는 습관은 가랑비처럼 나의 정신을 적시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산문도 쓰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은 산문으로 쓴 책 '어제 꾼 꿈과 오늘 꿀 꿈의 사이'라는 책도 2012년에 만들었지만 출간하기 전 시작은 이랬다. 

 

누구나 항상 무언가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이 있다.

 

나도 사진, 여행, 등등 중에는 산문쓰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항상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쓰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 있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10년이 가던 20년이 가던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날 그걸 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산문,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십여 개 정도 쓰니까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겨우 십여 개였던 건데 '내 생각을 만약 쓴다면 소설로도 몇 권은 될 꺼야!'라고 뻥튀기해서 생각했다니 거품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차분히 다시 생각했고 중앙일보에 격주로 연재하였다.

 

그 책이 나의 유일한 산문집 "어제 꾼 꿈과 오늘 꾼 꿈의 사이"다. 쓰고 싶다고 항상 생각하던 그 이야기의 거품을 걷어내니까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도 내 생각의 진로를 막고 그 생각과 나 자신을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을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누구든 반드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면 나의 이 경험을 말한다.

 

길을 운전하고 가다 보면 길이 끊어져서 없을 것 같이 길이 안 보이는 경우는 허다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불안감을 주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길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정해진 속도로 빠르게 그 길을 간다.

 

그 확신과 안 보이는 곳까지 가보는 것. (거품을 걷어내는 순간)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거기 길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시를 쓰면서 하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 -시가 나보다 먼저 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백 년 아니 몇 백 년 전에 지금 일어날 일을 알았다.

 

단순히 예측하는 예언의 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앞서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들의 대열에 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시가 나보다 먼저 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써놓은 시를 내가 나중에 '아, 먼저 갔구나' 하고 알았다는 경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시를 쓰기에 나만 경험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순간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은 자신 보다 더 먼저 앞선다. 단지 나는 내 시를 다시 읽고 그런 일이 있다고 알았을 뿐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다 신적(神的)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일까? 사진을 찍었는데 의외의 좋은 사진을 얻는다.

 

나의 실력에 걸맞지 않는 좋은 사진을 찍은 경우가 그렇다. 꼭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경우를 무의식이 만든 작품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내가 의식하는 일만 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의식하지 못하는 일,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신적인 일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나는 그 이유나 원인을 모른다.

 

단지 나를 초월하는 나 이상의 어떤 영감(靈感)을 경험하는 일은 확실한 것, 손에 잡히는 것만 믿는 나의 좁은 사고를 깨우는데 도움을 준다.

 

무엇이나 자신의 의지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들, 한 번도 실패를 맛보지 못한 운이 나쁘거나 어리석은 사람에게 참고가 되는 말이다.

 

 

OSJ.gif 
오석중 (시인/수필가)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문학 목록

Total 569건 8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