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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오석중의 세상 사는 이야기]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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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2-04 09:03 조회4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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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격주 금요일마다 [오석중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담담한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오석중의 세상 사는 이야기>는 급하게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들풀을 바라보는 여유를 주고 있습니다. 필자는 칠리왁에 살고 있으며 단상집 '구두수선공의 짧은 글 긴 생각', 산문집 '어제 꾼 꿈과 오늘 꿀 꿈의 사이', 그리고 '나는 해가 참 좋다' 시집을 쓴 문인입니다. <편집자 주>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120세를 바라본다지만 나는 이미 살아갈 시간보다 살아온 세월이 더 많고 그 시간은 자꾸 늘어가고 있다. 

나는 시인이면서 또 구두를 고치는 사람으로 내 인생의 황금기를 살아왔다. 아직도 준 황금기를 산다고 생각하기에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그리고 일 년 일 년을 보내던 허송세월을 접고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아내는 나이를 먹으면 좋은 글을 못 쓴다더니 왜 마음이 바뀌었냐고 물었다. 나는 아내가 걱정하고 있는 늙은이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한 우려를 안다. 젊을 때 내가 읽고 타산지석으로 삼은 실망스러운 글을 쓴 많은 노인들도 이렇게 지금의 나처럼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쓴 글이었겠지만 말이다.


요즘 TV등 매체에서는 강의 강좌나 자신의 고민을 질문하고 답하는 프로그램이 많다. 

아내도 그런 프로그램을 듣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에게 전해준다. 특히 자신의 고민을 질문하는 KBS의 '고민자랑 안녕하세요'라든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같은 프로를 즐겨 듣는다. 

고민은 어떤 고민이고 간에 자신이 처하고 싶지 않고, 벗어나고 싶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질문하는 사람은 대단히 큰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크고 보다 나은 인생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다.

얼굴의 어떤 부분을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서 성형을 고민하기도 하고 성형을 하고 그 부작용을 고민하기도 한다. 또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대한 고민,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고민, 엄마는 아들에 대한 아들은 엄마에 대한 고민, 친구는 친구에 대한 고민, 아내는 남편에 대한 남편은 아내에 대한 고민, 애인의 애인에 대한 고민, 나의 나에 대한, 나의 남에 대한 고민, 고민은 참 많다. 거기에는 반드시 입장과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차이라기보다는 내가 행복한가 아닌가에 대한 차이이며 간격인 것이다.


아내가 듣고 내게 들려주는 고민을 해결해주는 지혜의 말씀들을 들으면 우리가 입을 모으게 되는 것은 그것은 모두 (내 이야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 나의 문제야!“, “그래, 내 문제야!” 하지만 거기에 (나)는 누구일까? 아내와 내가 말한 (나)와 내가 의미하는 나는 똑같은 (나)일까? 아니면 우리일까? 님에 점을 하나 찍으면 남이 되고 나에 점을 안에 찍느냐 밖에 찍느냐에 따라서 나는 타인이 되고 갑은 을이 된다. 

우리는 웃지만 이런 가벼운 우스개라도 거기에는 그냥 웃을 수가 없는 면이 있다. 그렇기는 해도 고민의 주인공의 일이 나의 일은 아닌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나의 일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말하기를 그들의 일도 나의 일이라고하고 우리의 일도 나의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의 일, 본당자의 일, 자기 자신의 일, 그대들의 일, 심지어 남의 일, 적의 일조차 나의 일이라고 표현한다. 

그 (나의 일)은 정작 (나의 일)이 아닌데도 서로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이 우리끼리는 확실하다고 느끼면서 말한다. 정말 우리 끼리나 통하는 표현인걸까?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나)라는 표현 하나에서도 우리는 다른 나를 생각하며 같은 나를 말한다.


우리는 같이 말하지만 같은 의미로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거기서 내가 전하려는 의미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장미를 말할 때, 장미는 같은 장미지만 나의 장미와 너의 장미는 다르다. 우리가 록키를 말할 때, 록키는 같은 록키지만 네가 본 록키와 내가 본 록키는 분명 다르다. 

나의 아내가 말한 “내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라는 뜻인데 나의 “내 문제”는 내 자신의 문제라는 뜻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 

말은 이렇게 부정확하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장미와 다른 록키를 같은 장미와 같은 록키처럼 문제없이 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내가 말하는 장미나 내가 가 본 록키가 상대방의 장미나 그 사람이 가본 록키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같을까? 같다는 생각은 같지만 어떻게 같은지, 어떻게 하면 같아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고민을 객관화시켜봐야 한다. 

객관화해보지 못하면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고민은 고민을 객관화시키면 대부분 해결된다. 남의 입장에 대한 배려는 모든 문제를 남의 일에서 나의 일로 객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준다. 시어머니를 볼 때 시어머니의시어머니의 입장에서 시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것이 배려의 시작이며 객관화의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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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중 (시인)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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