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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우아한 비행]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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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in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7-06 12:02 조회4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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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살아가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리고, 나머지 얼마 안 되는 자유로운 시간을 몹시 괴로워하며 거기서 헤어나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아, 인간의 운명이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내 친구가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는데, 사람 구하면 누나 자리 하나 알아봐 달라고 할게.” 내가 돈을 조금 버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동생 쟈니가 불쑥 한 말이었다.

 

사는 게 팍팍하다고 엄살을 부린 것을 기억한 속 깊은 동생이다. “그 회사 야근해?” 나는 무슨 일인지 월급은 얼만지는 따지지도 않고 잔업 여부가 제일 궁금했다.

 

“한국에서 야근 안 하는 회사가 어디 있어. 그런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해.” 어이없다며 나를 보는 쟈니에게 대꾸했다. “네가 많이 벌어서 나 쫌만 주라.” 야근은 당연하고, 주말에도 한번씩 나가 못한 일을 끝내야 한다는 동생의 이야기가 놀라웠다.

 

한국 회사들은 마치 히틀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붙여 놓았던 슬로건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생각만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으로 산다. ‘저녁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의 월요일 저녁이 있는 삶, 글쓰기 수업. 40주째, 퇴근 후 부지런히 혜화동 글쓰기 수업에 간다.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을 나누고, 글벗들과 써온 글을 읽는다.

 

혹 숙제를 못하고 책을 읽지 못해도 괜찮다. 벗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그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이 있다.

 

이번 월요일은 수업이 일찍 파한 아쉬움에,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내려 동대문 호프집에 모였다. 글을 사랑하는 이들과 벗하며 늙어간다면, 내 삶이 내내 풍성해질 거란 마음이 든다. 화요일, 도심재속재가 수도원. 한 주 동안 작은 사람들에게 내 전부를 내어준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고달픈 일상이다. 밥벌이의 고단함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영성의 길은 왕의 길이 아닌 노동의 길임을 알아, 오늘의 고생을 묵묵히 감내하게 하길’ 기도 드리러 수도원에 간다. 시끄러웠던 생각을 침묵으로 신 앞에 내려놓는, 사회의 어둡고 핍박 받는 이들을 위한 초를 밝히는 동그란 기도의 자리가 소중하다. 발가벗은 내 영혼 전부를 그에게 맡긴 채 온몸으로 그의 임재를 바란다.

 

수요일, 북 콘서트, 작가와의 만남. 수요일이나 목요일은 출판사에서 하는 행사가 꽤 있다. 신간 홍보수단이긴 하지만 여러 저자를 직접 만날 수 있어서 신난다.

 

이번 주는 홍대 에반스 라운지에서 배우 윤진서 소설 <파리 빌라>의 북 콘서트가 있었다. 배우이면서 수필과 소설을 낸 매력적인 젊은 여배우가 궁금했다. 여배우답게 자신의 소설을 풍부한 감성을 담아 읽어준다.

 

씨앤블루 정용화가 나와 “어느 멋진 날”을 부른다. ‘저녁이 있는 삶’의 절정이다. 목요일, 지인과의 만남. 누구와 긴 시간 보내는 걸 힘들어하는 나는 짧고 굵은 만남을 선호한다. 주말보다는 주중 저녁이 좋다. 지인의 생일이었다.

 

그녀가 가고 싶어하던 합정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그녀의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2차에서는 ‘순하리’를 마셨다. 막차는 12시 24분까지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금방 밤을 침범한다. 괜찮다,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금요일, 하루쯤은 집안일. ‘저녁이 있는 삶’에도 지론이 있는데, 평일 중 하루는 집에서 밥을 해 먹고, 청소도, 빨래도 싹 해놓자는 것이다.

 

이는 혹 ‘저녁이 있는 삶’으로 엉망이 될 내 일상을 지키기 위함이다. 뽀송뽀송 마르는 빨래와 함께 일찍 잠이 든다, 토요일에 있을 ‘난민 영화제’를 기다린다. 일요일 오후에 있을 노을 출사를 위해 힘을 충전한다.

 

모든 일엔 때가 있다. 누구는 일이나 자기 계발에 집중하고, 다른 이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헌신할 때 나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

 

비어있고, 울퉁불퉁한 내면을 채우고 싶다. 글 모임과 수도원, 문화를 음미하며 말이다. 차지도 않은 채 쏟아내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머잖아 고이고 넘치면 자연스레 흘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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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5:25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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