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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힘 세설] 한글로 읽는 중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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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1-04 13:00 조회3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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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지혜와 인내, 그것이 '인간 다움'의 첫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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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려와서 우리 안에 들어왔다

 

 

인지(人智)가 깨어나기 시작한 이래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두려워하고 경외해왔다. 하늘은 자연의 최정점이기에 자연 속에 한낱 가냘픈 생명체로 살아야 했던 사람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경이로운 존재이고 신비롭고 위대한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하늘을 바라보는 신관(神觀)이 다르게 성립되었고 그것은 종교와 철학을 낳았으며 문명을 생성하게 하였다.

오늘날 서구문명의 근간이 된 기독교의 뿌리가 된 유대 민족은 일찍이 하늘을 인격신이 자리 잡은 곳으로 여겼다. 그 신은 화를 내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며 때때로 상과 벌을 주기도 하며 수시로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 말을 통하여 움직일 수 없는 절대가치를 가진 신의 계시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양 고전에 나오는 하늘은 말을 하지 않는 무언의 대상이면서도 세상을 섭리하는 뜻을 가진 절대 지존이었다. 하늘의 뜻은 하늘이 말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궁구하고 깨달아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은 직접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성인과 군자에 국한하고 있다. 공자는 "하늘의 뜻을 모르고서는 군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땅히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비로소 군자가 된다는 말이다.

 

 

▶정자(程子)는 말했다. "사람이 하늘의 뜻을 모르면, 해로운 일을 만나면 반드시 피하려 하고, 이로운 일을 보면 반드시 좇아가려고 한다."

명심보감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써 이에 보답하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화로써 이에 보답한다."고 하였다. 하늘은 말하지 않으나 무언중에 인간 세상을 섭리하는 데 복과 화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하늘이 삶을 주관하는 주체라고 여겼고 늘 하늘을 의식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사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품수된 신성에 의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불가에서도 모든 것에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皆有佛性) 사람이 존귀한 것은 바로 그 안에 신성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을 멸시하면 그 안에 신성을 모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과 뼈로만 되어있다면 어찌 귀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천부(天賦)의 인권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860년 수운 최제우는 용담정에서 수련 중에 신기(神氣)를 느끼고 마침내 천리를 깨닫는 깨닫음을 얻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고 선언했다. 사람이 하늘이기에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 듯해야 한다(事人如天)'고 하였다. 수운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한 것은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하늘을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보면 하늘을 보는 것이다.

 

다음은 요한복음 14장 20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우리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아버지가 계시게 된다. 그것은 우리와 아버지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의지는 인간을 통해서 실현된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으로 인하여 우리 밖에서 진리를 구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형성된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그 어떠한 것도 무가치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개역한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듯 모를듯, 글자는 아는 글자인데 뜻은 혼란스럽고 어렵다.

 

원저자가 표현하려고 한 내용이 글자의 뜻에 갇혀버리고 읽는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글자의 뜻대로 이해하며 또다시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렇게 몇 단계를 거치다 보니 원저자가 생각했던 것과 내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것 사이는 아주 멀리 벌어지고 말았다. 이래서 불가에서는 문자를 통해서 진리를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不立文字) 여기서 '말씀'은 희랍어 성경 원전에는 로고스(Logos)라고 되어있는데 로고스는 단순히 말씀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희랍인들이 로고스라는 말을 아주 다양하게 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이 되었든 로고스가 되었든 여기서 말하는 말씀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W)이라고 말하더라도 의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초에 W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것은 하느님이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생겨났다. 그것은 빛이었는데 우리를 비취되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원저자의 의도는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영靈이시므로 둘로 갈려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여럿으로 존재할 수 있다. 천강千江에 비치는 달빛은 하나같이 밝으며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의 개국을 알리는 기록이 삼국유사 첫 머리에 이렇게 적혀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여, 즉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 보내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 후 환웅은 곰이 여자로 변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단군왕검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과 땅위에 여자가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으니 우리민족은 하늘의 자손(天孫)이며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거룩한 민족이다.

 

 

▶자사는 중용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정확한 것은 아니더라고 자사는 기원전 483년에서 402년까지 살았다고 하였으니 중용이 써진 것은 분명히 이 년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 시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온전히 하늘로부터 품수된 것이라고 보았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자사가 '주다 받다'라는 말로 하지 않고 '명命'이라는 말을 쓴 것은 줄 수밖에 없어서 주었고, 받을 수밖에 없어서 받았다고 보여 진다. 그것은 곧 주는 자나 받는 자가 자의적인 일이 아니라 오직 섭리에 의한 일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성을 자의적인 선택으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 자전(字典)에는 명(命)을 줄 명으로 새기고 있어 역시 하늘이 준 것이 성이라고 여겼다.

 

다음에는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에 잘 따르는 것이 사람이 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데는 나름대로 치열한 수련이 필요하고 성인의 가르침이 요구된다. 중용을 이야기하려는 자사가 첫머리에 이런 말을 한데는 상당한 비의(秘意)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본성이 하자는 대로 해서도 안 되고, 본성이 하려고 하는 데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중용의 삶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사는 깊은 사유 끝에 첫 장을 이렇게 시작했음이다. 중용의 덕을 닦아 나가는 데는 성인의 가르침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는 학습과 수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본성은 그 자체로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다. 배고프면 먹기를 원하고, 졸리면 자기를 원하며,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원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기적이며 때로는 배타적이다. 그리고 공격적이고 잔혹하다. 생명체의 입장에서는 생존과 번식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된다. 오늘날 생명과학의 발달로 유전체계를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결국 사람은 유전자에 기록된 프로그램에 의해서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에 불과하다.

 

이것을 뛰어넘는 데 인간다움이 있게 된다. 사람이 동물의 세계에서 한낱 짐승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자가 말한 뜻은 '명(命)을 알아야 해로운 줄을 알면서도 피하지 아니하고, 이로운 줄을 알면서도 취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배가 고프면서도 먹을 것을 자식에게 먹이며, 자라서는 배가 고프면서도 먹을 것을 부모에게 먹일 줄 알게 된다. 욕망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탐욕에 빠지게 되고 일신을 망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을 무시하면 본성에 미치지 못하므로 목석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심현섭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5:25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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