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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어떤 새해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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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1-11 10:06 조회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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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필요하신 분은 가지고 가세요’

 

새해 첫 출근 날, 바쁘게 들어선 엘리베이터 안에 무언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 놓인 유아용 발판 위였다. 팔에 안으면 품에 쏘옥 들어올 크기의 ‘지구본’이었다. 그 위에 달랑 붙어 있던 흰색 메모지에 적힌 글귀가 눈을 사로잡았다. 

 

발상이 신선했다. 쪽지 하나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내가 갖고 싶었지만 출근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쳤다. 궁금했다. 

 

그 지구본을 누가 가져갔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지 그 생각으로 내내 시간을 보냈다. 

 

만일 그대로 있다면 갖고 갈 생각이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세계 여행을 꿈꾸고 싶었다. 

 

가고 싶은 곳에 표시를 해가며 그곳에 발자국을 찍고 어느 날,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내가 여기에 와 있구나 그렇게 느껴보고도 싶었다.

 

퇴근 후 들어선 승강기 안에는 지구본이 사라졌다. 대신 메모지 한 장이 벽에 붙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몇 년 전이었던가. TV 광고 아니면, 드라마였던 걸로 생각이 난다.

 

‘이사 오신 걸 환영합니다. 쌀가게는 큰 길 쪽에 있고요. 식품은 작은 슈퍼가 더 싸고 과일가게는 길목에 있는 집이 물건이 좋습니다. 새집에서 좋은 꿈 꾸시기 바랍니다.’

 

이사를 가는 사람이 이사를 오는 사람에게 현관 입구 신발장 위에 남긴 메모였다. 별것 아닌 쪽지가 그 가족에겐 하루 종일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낯선 환경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어갈 그들은 그 집에 정을 붙이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기분 좋은 나눔과 배려를 떠올리다 문득, 나도 몇 번 쓰다가 방치해둔 개구리 모양의 ‘가습기’가 생각났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지구본 주인처럼 좋은 사람을 찾아주고 싶었다. 다음 날 엘리베이터 안에 그것을 내놓았다. 노란색 포스트잇도 붙였음은 물론이다. 사인펜으로 이렇게 적어 놓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더불어 좋은 하루입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나는 가습기를 놓고 온 일이 은근히 궁금해졌다. 퇴근해 보니 개구리 가습기는 주인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가 앉거나 그냥 버릴 수도 있는 물건을 나눌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게 고마웠다. 환경보호도 좋지만 일종의 나눔 행사의 기쁨이었다.

 

그 후 승강기 안에는 또 하나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레고 블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며칠 뒤에는 어린이용 장난감부터 키덜트족(kidult族)이 좋아하는 캐릭터 블록과 여러 포즈를 취한 ‘피규어(figure)’까지 등장했다. 엘리베이터 타기가 점점 즐거워졌다. 아니, 이제는 승강기를 타게 되면 또 무엇이 놓여 있을지. 어떤 메모가 써있을까 하는 기대로 설렌다.

 

우리 아파트는 복도식으로 한 층에 여섯 가구가 산다. 십오 층짜리 아파트이니 구십 세대가 사는 셈이다. 이렇게 릴레이식으로 물건을 나누어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며칠 후엔 ‘곰 인형’이, 그 다음날엔 ‘로봇 장난감’이, 다음다음 날은 ‘시계’가, 또 어떤 날엔 ‘보행기’가 놓여 있었다. 특이한 것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꼭 하나씩만 내놓은 것이다.

 

엘리베이터 벽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잘 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에서 ‘고맙습니다’에 이르기까지 색색의 메모지가 교대로 붙어 있는 이색풍경을 볼 수 있었다. 

 

작은 물품을 내놓으며 하는 우리 동 아파트 주민만의 인사법이었다. 아니 점점 입 소문이 나서 이웃 동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빛깔 좋은 쪽지가 하나 둘 늘 때마다 나는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물론 나도 동참했지만 승강기 안이 나눔터가 되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과 함께 나눈 이웃들과의 여유로운 인사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분명 색다른 모습이었다.

 

몇 년 전, 엘리베이터 속 새해 인사 풍경이었다.

 

최영애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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