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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강가의 찻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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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01 08:07 조회4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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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은 고즈넉한 오후입니다. 책을 돌려 받기 위해 강물이 보이는 찻집에서 대학 선배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카페에 들어서니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선율이 감기어 옵니다. 한쪽 벽에는 우울한 하늘 아래 버썩 마른 나무와 흩어진 낙엽 속에 키 작은 소녀가 오롯이 서 있는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우울과 쓸쓸함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그림입니다. 자세히 보니 꽤 유명한 화가의 모사 품입니다. 잠시의 착각이 허망했지만 아늑한 정경이 카페와 잘 어울리니 카페 주인의 센스가 엿보입니다. 정갈한 모습의 카페 주인이 눈인사를 합니다. 늦은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도망가는 잠 때문에 디캡을 마실까 하다가 닝닝한 커피를 마시느니 차라리 하룻밤 새기로 했습니다.  

여린 햇살이 슬며시 눈꺼풀을 내리더니 갑자기 창 밖이 어두워졌습니다. 기다리는 선배는 아니 보이고 싸라기 눈이 흩뿌리더니 일순간 함박눈으로 변했습니다. 새들 날갯짓 소리도 허공 깊숙이 묻혀 버리고 나무들도 말이 없습니다. 하늘은 세상 가득 흰나비 떼들을 바람결에 풀어 놓고 심심한 나무들은 고요와 적막을 즐기는 듯 합니다. 커피 한 잔을 거의 비우고 리필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차가 말썽을 부려 좀 늦는다고 선배한테서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많이 늦어도 설령 오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바깥풍경에 취해 있다가 해 거름이 되어 일어서도 좋으니까요.

  벽에 걸린 키 작은 소녀의 그림에 자꾸 눈이 갑니다. 어릴 때 함께 자란 배꼽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몸이 불편하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늘 음악과 책과 꽃들과 시간을 함께 합니다. 친구도 그림을 좋아하여 가끔 그림 전시회에 동행을 했습니다. 그러다 친구에게 나르시스같이 수려하고 곱슬머리가 멋진 화가친구가 생겼답니다. 함께 전시회에 가고 차도 마시며 얘기도 나눈다고 무척 행복해 했습니다. 화가친구가 전시회를 열면 그림을 걸 수 있도록 저에게도 공간을 주겠다며 저보다 더 설레었습니다. 만나면 온통 화가친구 얘기로 꽃을 피웠고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친구의 모습에서 사랑을 엮어가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 꽃잎처럼 힘이 빠진 목소리로 친구가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사랑하던 그가 떠나버렸다고……

화가친구는 그림 한 점만을 달랑 남기고 펑펑 눈 내리던 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넓은 세상에 나가 폭포수 같은 열정을 바치고 좀 더 부대끼는 삶을 살고 싶다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본분도 저버리고 자기 자신과도 단절된 삶을 택한 화가친구를 말없이 보내 주었답니다. 쓸모 없는 그리움이 가슴을 쳐 몇 날 며칠을 앓아 누웠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단춧구멍만한 희망을 품고 살았답니다. 향기만 남기고 달아나버린 화가친구를 제 친구는 무척 사랑했었나 봅니다. 친구는 그런 아픔을 홀로 삭이며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머무르지 않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화가친구가 제 친구를 아프게 합니다. 그 후로 친구는 그림 전시회에 가는 일이 뜸해졌습니다. 산은 무성하다가 비우고 어느새 또 다시 가득 채웁니다. 하르르 날아가는 꽃잎도 잠시 머물다 사라집니다. 돌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조각난 햇살처럼 부서진 세월을 보냈던 순후한 친구의 아픔이 제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다시 창 밖을 바라 봅니다. 해는 안보이고 차츰 날은 저무는데 한 자락 바람은 차갑기까지 합니다. 내리던 함박눈도 그치고 강물도 말이 없습니다. 어느새 온천지가 하얀 너울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함박눈에 덮인 흑백으로 절제된 풍경은 도도하리만큼 아름답습니다. 저 만큼 선배가 서둘러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모습이 보입니다.

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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