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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내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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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0-25 09:25 조회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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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알람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억지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거실 스탠드의 불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먹다 남은 과자봉지 부스러기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어져 있었다. 애들이 다 그렇지 하면서 거실에 켜진 불을 끄고, 대충 어질어진 자리를 정리했다. 

반쯤 발을 내어놓고 자고 있는 딸아이의 이불을 덮어주고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방문을 닫고 나왔다. 다시 힘을 내어 스산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일터로 발을 옮겼다. 대문을 나서며 불현듯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녁 시간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는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버지께서는 대구에 있는 동촌 미군부대의 주방에서 밤새 일하셨다. 

매일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일터까지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가셨다. 5남매의 생계를 위해 당신이 원하던 학업을 그만두시고, 저녁마다 일을 나가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 오셨다.  

비가 오는 궂은 날에도, 바람이 불고 쌀쌀한 날에도, 눈이 내리던 날에도 어김없이 자전거의 바퀴는 돌아갔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실 새벽 무렵엔 어린 나는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내가 자지 않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는 가끔씩 아버지께서 가져오시는 맛있는 과자나 내가 좋아하는 감자튀김과 쵸코우유가 있을 때였다. 

아버지께서 힘드시지 않을까, 피곤하시진 않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걸 가져 오셨을까 아닐까 하는 게 더 큰 관심거리였다. 그렇게 철이 없고 온통 내 생각밖에 하지 못하던 나였다. 그런 자식이 좋아하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더 즐거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때는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자식들을 위해 일하시는지 몰랐다.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새벽에 가족들을 위해 일터로 향하면서 이제서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잠자는 아이들을 보며 새벽에 출근하는 모습과 어릴 적 아버지께서 새벽에 퇴근 하셔서 아직 곤하게 자고 있는 자식들을 보는 모습이 똑같이 겹쳐져 보였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낮에 주무시기만 했고, 아버지의 나이 40에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 아들과는 많이 놀아주지 못했다. 별로 말씀도 없으시고, 무뚝뚝하고, 거리감이 있었다. 

어릴 적 이 못난 자식은 아버지께 잘 해드리지 못했던 점보다 내게 잘해 주시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버지께 해드린 건 별로 없다. 내가 대학원 졸업식 때 자랑스런 마음으로, 멋지게 내 가운을 벗어 입혀 드리려 할 때, 아버지께서는 폐암으로 병실에 계셨고,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이제 맛있는 것도 사드릴 여유가 되었을 땐 이미 아버지께서는 내 곁에 계시지 않으셨다. 

시간은 여유롭게 기다려 주지도 않았고,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지도 못했다.  


어머니께서 가끔 얘기하셨던 ‘내리사랑’이란 말이 떠오른다. 물이 위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듯이 부모님께서 자식들에게 주신 사랑에 비해 거꾸로 자식이 부모님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향한 사랑은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일컫는다. 

부모님께서 주신 사랑은 언제나 흘러 넘치도록 가득했지만 내가 부모님을 생각하고 부모님께 드린 사랑은 늘 부족하기만 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님과의 통화에선 건강하냐고, 애들은 잘 크느냐고 물으신다. 

타국에 사는 막내 아들과 손자들 생각으로 걱정이신 마음을 전해 듣는다. 내리사랑이란 부모님이 내게 주신 사랑을 그대로 내가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대물림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서 내게 주셨던 크신 사랑처럼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쏟고 있는 사랑 말이다.


저녁을 먹으며 큰 아들녀석에게 아빠가 새벽에 출근하면서 떠올린 옛날 기억을 얘기 해 주었다. 그 당시엔 너처럼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고 난 후 이제서야 깨달았노라고. 

세월이 흘러 네게 어떤 아빠로 기억이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런 이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너도 내가 그랬듯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게 내리사랑이란 것을.


내년이면 이제 어머니의 연세가 팔순이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꼭 찾아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재욱/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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