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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라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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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10 13:30 조회6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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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211244523895_00_162.jpg                                                                      

한국의 식사문화를 바꿔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라면의 위세는 여전히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1960년대의 식량난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일조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다양한 입맛을 선도하는 역할도 맡고 있는 게 라면이다. 삼양라면이 1963년 처음 선보일 때만 해도 ‘라면(raman)’이라는 생소한 이름만큼이나 낯을 가렸다. 모양이나 맛이 색다르다 보니 소비자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음해성 유언비어도 만만치 않았다. 쓰고 버린 공업용 우지(牛脂)와 화학조미료를 잔뜩 범벅이를 해서 기름에 튀긴 유해 식품이라며 피하도록 선동하는 소리도 나돌았다. 심지어 면(麵)이 면(綿)으로 둔갑해서 쓰다 남은 헝겊 조각을 풀어 넣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악성 루머까지 퍼졌다.  

기근과 빈곤이 극심한 때였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의 도움으로 겨우 아사 직전의 어려움을 견디는 처지였기에 혼 분식을 장려하던 정부는 값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의 보급에 나섰다. 한편 삼양식품은 거리에서 시식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판매 홍보와 전략을 펴서 효과를 거두자 매장과 식당에서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1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 유혹의 매개 노릇을 해냈다. 나는 삼양라면 장위동 공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신선한 우지와 통닭, 감자 같은 영양분이 넘치는 첨가물이 들어가는 라면 제조 과정을 목격했고 설명도 들었다. 이후로 나도 라면 애호가에 선뜻 합류했다.

라면은 누구나 손쉽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의 절대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파 송송 달걀 탁!”이 아니더라도 다만 끓는 물만 있으면 뚝딱 5분 이내에 라면 발이 입안에 들어간다. 여기에다가 우리의 자랑 김치가 식탁에 놓이면 일등요리 부럽지 않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루음식은 꺼리는 편이었다. 맛을 분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먹고 나면 신 목이 올라 불쾌했다. 분식과 떡 류는 질색이었다. 이런 편식습성에다가 어려서부터 음식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다. 소식하는 편이고 딱히 선호하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 술과 담배에 빠진 후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술안주로는 생마늘과 매운 고추를 찾았다. 탕이나 국 종류도 별로 였다. 술꾼이 해장국을 모르고 살았다면 짐작하지 않겠는가.

삼양라면 공장의 시식코너에서 처음 라면을 대했다. 대접 받는 자리이니 체면상 마지못해 라면 발 몇 가닥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입안에 넣었다. 덤덤했다. 한 모금 마신 국물 맛은 기름기가 있어 좀 느끼한 편이었다. 이런 내 꼴이 탁했던지 앞에 앉은 일행이 유일한 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자기처럼 곁들여 먹어보라며 시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나도 따라서 김치 조각을 라면에 얹어 입 안에 넣고 씹어봤다. 어라……? 예상외로 상큼했다. 다시 좀 많은 양의 라면을 역시 김치에 싸서 먹었다. 이번에는 시원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맛이 감돌았다. 젓갈 질이 자질수록 라면과 김치의 혼합은 개운하고 구수한 맛까지 곁들여지면서 거의 환상적인 별미를 연출했다.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삼양라면 공장에 초청받아 견학했던 일행 모두가 같은 특이한 구미를 경험하고 돌아왔다.

한 보따리 선물로 받은 삼양라면으로 공장 견학하고 돌아온 날 저녁 우리 집은 푸짐한 라면 잔치가 벌어졌다. 기왕에 이웃들도 초청했다. 내 제의에 따라 반찬은 오직 대가리만 썰어 놓은 배추김치뿐이었다. 이상한 잔치 풍경에 교자상에 둘러앉은 식객들은 좀 아연한 기색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초청해 놓고 국도 죽도 아닌 노르무레한 음식을 반찬이라고 달랑 김치 하나만 내놓고 대접하다니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일어설 수도 없는 노릇, 식객들은 마지못해 라면을 먹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시답지 않게 시작한 라면 잔치는 오래지 않아 후루룩, 어~허 시원하다!의 탄성을 연발하는 푸짐한 분위기로 돌변하고 말았다.

라면과 김치는 찰떡궁합이다. 동물성 기름에 튀긴 면발과 자연의 젖산발효식품이 만나 기막힌 조화를 이룬 것이다. 물론 절대 우연한 만남이었다. 거기다가 일반화된 연탄아궁이가 천연스럽게 가세하면서 라면과 김치, 연탄불 삼위일체가 척척 맞아 돌아가는 바람에 라면은 순식간에 국민음식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연탄아궁이에는 스물네 시간 펄펄 끓는 물이 대기해 있고 김치 또한 언제라도 대령하는 한국 가정에서 라면은 즉석식품의 진가를 발휘한다. 허기를 순식간에 해결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군것질 간식 역할까지 해내는지라 라면의 선호도는 육십여 년 동안 기타 면류(麵類) 음식을 제치고 앞장서 달린다.

가까운 집안을 방문할 때 라면 몇 봉지를 선물로 들고 갔던 옛날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쌀 없으면 라면 끓여 먹지 세대’에게도 지금은 인기 만점 기호식품이 된 라면이 배곯았던 시절의 유일한 구원의 양식이었다고 궁색을 떨어 봐야 귀담아듣지 않는 세상이다. 다만 그 옹색했던 시절의 회상을 통해서 인색함이 아닌 근검절약의 마음은 계속 지니고 있었으면 싶다.       



灘川 이종학/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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