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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밥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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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8-07 19:27 조회4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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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전쟁터 경험에 익숙했다. 6.25 전쟁도 아니고, 월남전도 아니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더더욱 아니었다. 슬프거나 비참한 광경이 없고, 포탄과 죽음이 없는, 내게는 "참 그리운 전쟁터"였다.

대가족의 아침 식사 시간, 혹은 느지막한 겨울의 따뜻한 온돌방안에서 왁자지껄 온 가족이 밥 먹느라 정신 없던 시간이 통상 전쟁의 원흉지였다.

시원한 무를 듬성듬성 깔고 은빛 비늘이 싱싱한 갈치조림을 엄마는 늘 슴슴하게, 국물이 자박한 스타일로 끓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식성은 갈치 조림 하나라도 짭조름하게, 국물 없이 고춧가루 듬뿍 넣고 졸이는 형태를 좋아하셨다. 나물 몇 가지만 있어도 간단히 해결되는 비빔밥만 해도 두 분의 식성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엄마는 가족 중 제일 어린 딸이었던 내가 봐도 늘 싱겁고 매력 없는 박나물이나 무나물 따위에 그 국물을 넣어야 했고, 아버지는 생선 구이 한 마리를 뜯어 넣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듬뿍 넣은 자극적인 비빔밥을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식사하는 내내 "저런 비빔밥이 어디 있느냐"며 고향 동네에서는 여기에다 뭘 넣고 또 뭘 넣는다고 늘상 그 다양한 가짓수를 읊어대셨다. 엄마도 이에 질세라 "나물 냄새 향그런 비빔밥에 비린 생선을 구워 넣어 먹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식이냐"며 포탄을 쏘아댔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싫었던, 사이에 낀 다섯 형제 자매나 이모, 혹은 삼촌 같은 식탁 식구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적당히 알아서 비벼먹고 슬금슬금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쪽이라도 편을 들어야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안되면 지원군 형태라도 시늉을 해야 하는데......정작 맛은 그냥 두고라도 도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우리는 입장이 매우 곤란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용돈이나 하다못해 잉크, 노트 값 등속을   아버지께 받아가야 하는 언니들은 무작정 엄마 편만 들 수 없는 노릇이었고, 아버지 식 비빔밥 맛이 엄마 식 보다 내 입맛에는 더 나았지만, 나중에 엄마 따라 시장 구경도 가야 하는 나 역시 입장이 난처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어린 내가 영악하게 생각해 낸 것은 "엄마 쪽이 맛있을 때도 있고, 아버지 쪽이 더 나을 때도 있다"는 양비론. 때에 따라 이 쪽 저 쪽에 다 붙을 수 있는 박쥐 수법이었다. 

때로는 그 수법이 잘 통하기도 했고, 어린 막내 정도는 아무도 별 상관 하지 않는 " 공식 스파이" 역할을 맡거나, 때로는 상황을 보면서 고자질하는 악역을 맡기도 했다."담부터는 절대 박나물 비빔밥 안 먹는대......"

밥상을 받을 때마다 집안이 저절로 전쟁터가 되는 이유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엄마 고향은 경남 통영이었고, 아버지 고향 동네는 전남 고흥군 녹동......같은 바닷가 라도 재료를 손질하는 방법과 양념 법은 매우 달랐다. 후덕한 몸집의 여수 고모가 만들어 오시던 그 맛깔 나고 다양한 젓갈은 경상도 쪽 맛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 넓지도 않은 우리 나라 동서 지역의 분쟁 아닌 분쟁이 우리 집에서는 <밥상 위의 전쟁>으로 나타나면서 가족들은 저절로 배우게 되었다.........아, 음식은 역시 전라도 쪽이구나......
그렇지만, 가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부산에 살고 있었고 살림 주도권은 엄마가 쥐고 있었으므로 결코 입으로 발설하는 어리석은 짓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전쟁의 결말은 없었다.

승자와 패자가 없는 옛날식 밥상을 받아 다시 한번 그 무수한 말의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 시간이 그리울 뿐이다. 이제는 지역 특산물이나 음식도 전국적인 평준화를 이뤄서 아무데서나 충무김밥을 먹을 수 있고, 포항물회를 먹으며, 오장동 냉면을 먹는 시절이다. 미국 LA 코리아 타운에 가면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메뉴가 많을 만큼. 연기 피어 오르던 전어구이 냄새나 양념장 발라 굽던 장어는 어디에도 없다. 내 기억 속의 밥상 전쟁터 외에는.

김순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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