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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스마트 소설 - 복권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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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in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9-30 13:11 조회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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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서북부 대평원 도시 에드먼턴의 가을이 깊어 간다.

 

북극권의 영향을 받는 10월의 하늘은 맑고 청명한데 으스스 쓸쓸한 내음을 흩뿌리는 바람에는 제법 싸늘한 한기가 감돈다.

 

돌아갈 길 없는 낙엽은 처량하게 떨어져 바스락거리며 이리저리 날린다. 권 노인은 오늘 아침에도 정각 10시에 애완견 논다리를 데리고 바로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다.

 

은퇴하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시작한 중요한 일과이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가량 걷고 나서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시간을 보낸다. 탈향 25년에다 해외 유랑 40년이다. 그러면 논다리는 주인의 발을 베개 삼아 낮잠을 즐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런 평온한 풍경에 사흘 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권 노인이 앉아 사색을 즐기는 벤치 옆자리에 낯선 할머니가 슬그머니 와 자리를 잡으면서 비롯된 일이다.

 

그녀도 산책을 나온 듯 천천히 걷다가 권 노인이 앉은 벤치 한쪽에 다소곳이 몸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닭 쳐다보듯 앉아 있던 할머니가 슬며시 다가앉으면서 종이 봉지에 든 것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것 좀 드시겠습니까? 열흘 전에 한국에서 가져온 흰엿이랍니다.”

 

권 노인은 깜짝 놀랐다. 한인 할머니였다. 그녀는 처음 대하는 사이임에도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여간 살가운 게 아니다.

 

“한국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손자가 여기에 살고 있어서 다니러 왔어요. 어여 이거 받으세요. 유명하다고 소문난 원주 흰엿이랍니다.”

 

“이 귀한 것을 주시는군요. 흰엿을 먹어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까마득하네요.”

 

권 노인은 좀 주저하다가 할머니가 내미는 흰엿가래를 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잠에 곯아떨어진 줄 알았던 논다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할머니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어허. 이놈 봐라? 버릇없이 무슨 짓이냐!”

 

권 노인은 한 손에 잡고 있던 개 목줄을 잡아당기며 호통을 치고 나서 흰엿가래하나를 받아 두 손으로 잡고 한가운데를 똑 소리가 나게 힘껏 분질렀다.

 

여지없이 두 동강 난 엿가래는 여러 개의 구멍이 숭숭 뚫렸다. 어느새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서리서리 재워졌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찰까닥 찰깍~ 찰까닥 찰깍, 엿장수의 엿가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들려오던 서민의 삶과 애환을 담은 소리가 아니던가. 엿 맛 또한 기똥찼다. 바삭 하게 씹히면서 입안 가득 번지는 달콤한 맛은 삭신을 다 노곤하게 했다.

 

이튿날 아침도 권 노인이 논다리를 앞세우고 공원에 나갔더니 어제 만났던 그 할머니가 먼저 나와 있었다. 두 노인은 백년지기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란히 산책길을 걸었다. 동족이라는 개념은 언제라고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논다리란 놈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거치적거리는 것이었다. 마치 다정한 두 노인을 훼방이라도 놓을 듯이 말이다. 권 노인이 개 목줄을 잡아당기고 목사리를 끌어내도 막무가내였다.

 

사단은 사흘째 되던 날 터졌다. 이날도 두 노인은 아침에 자연스럽게 만나서 같이 산책을 즐겼고 벤치에 앉아 정담도 나누었다. 그러다가 헤어질 때가 되자 할머니는 부스럭거리더니 핸드백에서 종이에 싼 흰엿 한 뭉치를 꺼냈다.

 

“이거 받으세요. 캐나다에서는 귀하게 여기려니 하고 흰엿을 좀 사 왔는데 손자네 식구들은 다들 좋아하질 않네요. 엿을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나 많이……. 기왕에 주시니 조금만 받지요.”

 

권 노인은 극구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가져가시라면서 엿 뭉치를 막무가내로 내민다. 바로 이때였다. 논다리란 놈이 갑자기 달려들어 할머니의 손을 덥석 물었다.

 

“아이구머니나!”

 

할머니의 비명과 동시에 권 노인은 개 목사리를 잡아채면서 재빠르게 할머니의 물린 손을 덥석 잡았다. 다리가 다 후들거리고 혀가 타 들어 가 입을 열 수가 없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금세 입가에 미소까지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물지는 않고 으름장만 놓았으니 걱정 마세요.”

 

“그럴 게 아니라 어여 병원에 가셔야 해요.”

 

권 노인은 전전긍긍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그럴수록 할머니는 오히려 더 느긋해지면서 느닷없이 물었다.

 

“개에게 어깨를 물린 적이 있으셨죠? 아마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을 걸요.”

 

“아~니 그걸 어떻게……!”

 

권 노인은 이번에는 혼절할 지경에 몰리고 말았다.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그렇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말을 계속했다.

 

“논다리 동네 기와집 생각나세요? 나 옥순이라구요. 우리 집 대문을 기웃거리다 진돗개한테 물려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잖아요. 필시 개들도 질투를 하나 봐요.”

 

여전히 권 노인은 놀란 입이 말을 듣지 않는 사이, 할머니의 추억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잘도 나왔다.

 

“권문달 씨, 사실은 그때 제가 문달 씨를 좋아한 걸 우리 진돗개가 알았나 봐요. 시샘이 단단히 난 거지요. 저놈 논다리도 그래서 나한테 달려든 거잖아요.”

 

 

열일곱 살 때였다. 논 다리 마을에 살던 권문달은 기와집 딸 옥순이를 간절하게 사모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지주의 딸을 소작인의 자식이 넘보다니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런 데도 그는 걸핏하면 기와집 대문을 기웃거리다가 사납기로 소문난 옥순네 진돗개에게 어깨를 물려 혼쭐이 났었다.

 

“어허! 참말로 그 옥순이여?”

 

옥순이의 대답 대신 권 노인의 귓가 멀리서 아버지를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어서 여러 사람이 웅성거림도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이제 정신이 드세요?”

 

권 노인은 힘이 들었지만 두 눈을 번쩍 떴다. 눈앞으로 밝은 빛이 지나가는 듯했다. 동시에 후유~ 정말 오랜만에 콧구멍이 미어지도록 긴 숨을 내쉬었다. 쓰러져 내내 가사상태에 빠졌었다. 그런데 뜻밖에 몰래 사랑했던 고향의 옥순이를 꿈에서 생생하게 만나고 나서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회생했다. 사랑의 힘은 역시 위대했다.

 

 灘川 이종학/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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