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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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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1-04 12:44 조회3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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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함박눈이 수런수런 차분하게 내린다. 오래지 않아 헐벗은 나뭇가지에 순백의 꽃이 소복하게 피어난다. 향기는 없어도 생화보다도 시각적인 흡인력이 더 뛰어난 게 눈꽃의 특징이다. 이렇게 아련한 매혹을 지닌 꽃을 피우려고 가을바람이 그토록 야박하게 나뭇잎들을 털어냈나 보다. 문득 조선 시대 시인 송강 정철(鄭澈)의 시조가 떠오른다.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꺾어내어 임계신 데 보내고자

임이 보신 후에야 녹아지다 어떠리

 

시인은 갔어도 시인이 노래한 눈꽃은 이 겨울에도 여전히 피어나 그리운 감성을 자극하는구나. 세월과 눈꽃은 그대로인데 시인과 그 감성의 대상이었던 임은 계시지 않는다. 지금도 여일 하게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따라 인걸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인생무상이 아닌가. 소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한 생성을 의미 한다는 소멸의 아름다움이라도 붙잡아 매고 싶은 세밑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창 밖을 내다보니 어허, 이 노릇을 어찌할꼬! 아침 내내 탐스럽게 피었던 눈꽃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매서운 삭풍에 요동치듯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애처롭다. 가늠하기 어려운 게 겨울바람이다. 400여 년 전 시인이 바라본 그 눈꽃이 아니었다. 강물은 언제나 흐르지만 어제의 그 강물이 아니라는 말처럼 당연히 먼 옛날의 그 눈꽃도 아니다. 다만 애틋한 시인의 시정(詩情)만이 시공을 넘어 눈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눈꽃은 시인의 영원한 흔적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영롱하게 남는다.

 

나는 2015년 을미년을 보낸다. '보낸다기보다 더불어 간다'는 말이 옳다. 이 한 해를 살면서 나에게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흔적으로 남을 만한 기억은 별로다. 어영부영 덧없는 날을 보내며 살아온 셈이다. 사회학자 자그문트 바우만의 저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착각에 소름이 돋는다. 그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할 수 있다.”는 검불 나부랭이같이 나 또한 쓸려나가는 잉여 인간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난 한 해의 삶을 이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무엇인가를 찾아보았다. 응답하라 2015년이여!

 

다만 독자들 앞에 내놓았던 몇 편의 창작품이 있을 따름이다. 나름대로 온 힘을 기울여 쓴 내 작품들을 나의 흔적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결정은 오직 독자들의 고유 권한이다. 그래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정말 조심스러웠다. 독자들과 더불어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작품, 다시 말하면 크고 작고 간에 흔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작품은 아아, 얼룩진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다. 내 가치관의 잣대로 작품을 내놓고 어설픈 미소를 칠하며 독자들을 바라보는 깨달음이 부족한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문학적 긴장이다. 소위 작가의 존재 이전에 매나니 밥 만도 못한 인간 취급을 받아서야 하겠는가!

 

나는 마침 연말을 미국에서 보내게 되어 반가운 문우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문학단체의 송년 모임과 작품발표회, 시낭송회에 참석도 했다. 조국을 떠나 살아도 한국문학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인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피땀 어린 작품들을 발표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1년에 고작 한두 번 제작하는 회지나 동인지에 발표하거나 아니면 작품집을 자비 출판해서 독자들과 만나는 기회가 고작이다. 동포신문 등 한글판 간행물은 문학작품 취급에 인색한 편이다. 그렇다고 조국에서 지면을 할애 받기란 가히 하늘의 별 따기다. 책상 서랍 속에 갇힌 문향(文香)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나는 이곳 문우들에게 자랑을 한다. 내가 사는 고장에는 비록 주간이긴 하지만 4개의 한글판 신문이 언제나 문학작품을 발표할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문학회원들의 창작활동을 위해 신문은 지면을 내주고 정부는 재정 지원을 한다. 부럽지 않은가? 와하! 그런 별천지에 우리 모두 이사합시다. 하긴 이런 문학 낙원이 흔할 리 없다. 그래서 나는 푸짐한 자랑을 늘어놓은 만큼 동포의 풍성하고 알찬 작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말달리는 눈바람 소리가 멎었는가 싶더니 창 밖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다시 화사하게 피어났다. 언제 보아도 정철 시인이 노래한 불멸의 흔적이다. 쓰는 삶을 선택한 나는 살며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판에 목을 매고 뚜드린다. 그러면, 거칠고 메마른 내 손등에 눈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착시(錯視)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灘川 이종학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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