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최상연의 시시각각] 황교안 불출마는 시작이다
밴쿠버 중앙일보 뉴스 | 업데이트 17-03-16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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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표의 롤러코스터가 그런 경우다. 지금이야 기세등등한 대세론 주자지만 1년 전만 해도 재·보선에 완패한 패장이었고 책임론을 외면하던 아슬아슬한 처지였다. 안철수 전 대표가 당을 뛰쳐나가자 4월 총선을 비문(非文) 선수인 김종인 비대위로 치러야 했다. 그런 그를 불과 몇 달 만에 한국 정치의 대안으로 떠올린 에너지는 스스로 만든 게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살골이다.
똑같은 식이라면 지금 망가진 보수에겐 문재인과 친문, 친노가 자책골로 무너져야 제대로 된 재건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다. 실제로 여의도에선 그런 식의 얘기가 많다. 이번 대선은 문재인 판이다. 하지만 친박 패권에 질린 민심이 친문 패권을 용납할 리 없고 2년 뒤 총선은 보수 싹쓸이란 것이다. 뭐 그럴 법한 기대 겸 전망이다. 영광의 순간도 절망의 나날도 이 또한 지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
박 전 대통령이 ‘진실은 밝혀진다’며 탄핵심판을 비웃고 친박 의원들이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건 그런 심정이 바탕일 게다. 언젠가 친문 패권이 대형 자살골을 터뜨리면 재기의 기회가 온다는 믿음 말이다. 개헌을 얘기하는 같은 당 의원들에게 ‘반문질’이라고 발언 횟수를 체크하는 친문 패권이다. 벌써부터 완장 찬 점령군 모습에서 친박은 그런 가능성을 읽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설사 ‘영남 자민련’이 되더라도 무조건 버티자는 결의를 다지는 거다.
문제는 그때까지의 보수 정치 공백이다. 더 큰 문제는 그냥 뭉갠다고 영남 자민련이 저절로 탄생할지도 의문이란 거다. 선거는 감동인데 자기 희생과 솔선수범 없이 감동의 에너지가 만들어진 경우란 없다. 폐족으로 몰렸던 친노가 부활한 데는 목숨을 던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장함이 있었다. 대구·경북(TK) 민심을 무슨 맡겨 둔 재산인 것처럼 인질로 잡겠다는 발상도 우습지만 태극기를 탈출구 삼고 국회선진화법 개정에 몽니나 부리는 수준으로 과연 나라를 경영할 재기의 밑천을 만들 수 있을까.
보수가 다시 일어서려면 먼저 무너진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현재의 보수 위기는 인물 기근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인물난을 만든 근본 원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의 패권 정치가 진앙이다. 나라는 안중에 없고 개인과 계파 이익이라면 극악스럽게 달려든 몰상식에 떠나간 마음이다. ‘원칙과 신뢰’가 박근혜의 대표 브랜드였던 만큼 배신감은 증폭됐다. 친박 패권을 바라보는 TK 민심이라고 다를 게 없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주된 기준점은 북한이다. 나머지 분야에선 두드러진 입장 차를 느끼기 힘들다. 진정한 보수라면 친문 패권과 종북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그러자면 친박 패권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내려놓는 게 우선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불출마는 하나의 물꼬다. 친박 패권 당사자라면 개인 비서를 자처할 게 아니라 은퇴와 후퇴에 줄 서는 게 상식이다. 그래야 갈라선 보수가 힘을 모으고 새 인물을 발굴하는 길이 열린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황교안 대행마저 링을 떠나 보수는 이번 대선을 팀으로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 기회에 오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명망가 정당 체질을 확 바꿔 반패권의 시스템 정치, 범보수 연대 정치의 새 길을 찾아내야 한다. 적군 망하는 걸 기다리며 똬리 틀고 버티는 오기(傲氣)만으론 보수의 분열을 막을 수 없다. 정권을 헌납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캐머런 전 총리가 영국 보수당을 되살린 신의 한 수도 ‘무조건적 반대는 안 된다’가 만든 감동이었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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