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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지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또 하나의 대형사고였다. 사실 나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한국은 내게 처음부터 그런 나라였으니까. 떠나기 전부터 다시 돌아와서까지 한국에서 대형사고는 흔했다. 1세대로부터 들었던 바로 비리와 비상식이 난무한다는 복잡한 나라, 아빠가 보는 한국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가끔 소식을 들었던, 그렇지만 몸으로 느껴본 적 없이 관념으로만 아는, 그런 한국에 살러 가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던 먼저 한국을 경험해 본 선배들이 있었다. 나는 언제든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면 되지 라는 …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아~ 진정 난 몰랐었네.” 어릴 적부터 아빠는 노래하는 자리에서 꼭 이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캐네디언 직원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도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아빠가 부르는 이 노래가 무슨 뜻이냐 묻는 직원들 때문에 그제야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나는 홀로 길 위에서면 종종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길 위에서면 나는 묻고…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것, 냉정한 관찰보다는 함께 하는 감성이 필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유언대로 1954년 예수를 믿고 고아원을 설립하셨다. 아빠가 네 살 되던 해였다.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고아처럼 살았다. 마음이 제일 착했던 셋째 아들 아빠에게 할아버지가 고아원을 맡기고 싶어 했을때, 아빠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결혼도 하기 전이었던 아빠는 미래의 당신 아이들을 고아들과 같이 키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삶이 어떤 모양인지 아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아빠의 …
2015년 정월 초하루는 너그럽게 눈 쌓인 덕유산을 오르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눈꽃 핀 산에서 새해 첫날을 걸으며 다짐하고 싶은 한 해였다, 하지만 전날 밤부터 찾아온 복통으로 인해 아쉽지만 산행을 포기했다. 2016년 새해가 되면 겨울 산에 함께 가자는 글벗의 권유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덕유산을 오르려 했던 계획이 무산된 첫날의 2015년부터 그 일년의 시간 전부가. 누구에게도 깊이 나눌 순 없었지만 2015년은 녹록하지 않았다. 과거의 희미해진 아팠던 날은 현재의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와 선명해졌…
차가 없는 서울생활에 내가 선택한 쉼은 걷는 것이다. 지하철, 버스가 답답한 어떤 날, 내 작은 집이 숨이 막힐 때, 무작정 걷곤 한다. 문득 ‘내가 왜 한국에 있지’, 이곳에 속한 것 같지 않을 때 탁 트인 한강 다리를 건넜다. 좋은 친구가 그리울 땐 사람 냄새 나는 어느 동네 풍경을 벗 삼아 좁은 골목을 걸었다. 약속 없는 일요일에는 청파동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의도까지 걸었다. 걷기는 일상에 지친 나를 추스르는 방법이다. 길을 걷다 만나는 도시 풍경 속에서 얻는 영감도 있고, 타인의 …
“왜 한국에 왔어요?” 종종 받는 질문이다. 한국을 ‘헬 조선’이라고 표현하는 지독한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살기 만만치 않은 곳이기에 이 질문은 더는 서운하지 않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하고 살고 싶어서요.”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 갔던 중학교 2학년 첫날, 시골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있던 나는 교문 안으로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학교 앞까지 데려다 준 아빠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나를 한동안 달래야 했다. 발이 떼지지 않았다…
오랜만이었다. 마이애미, 뉴욕, 내쉬빌, 밴쿠버, 말레이시아에서 온 우리가 서울에 모였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지 못한 이후로 처음이니 몇몇 사촌들과는 육년 만이었다. 은퇴 후 말레이시아에 의료선교를 떠나신 큰 아빠, 큰 엄마와는 더 오래된 듯 했다. 알래스카와 시애틀, 일본에 사는 다른 사촌들, 케냐로 선교를 떠난 작은 아빠는 아쉽게도 이번 모임에 함께 하지 못했다. 감사하게 부모님도 밴쿠버에서 먼 길을 오셨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각자의 다른 길에 주어진 삶을 순응하며 살고 있었…
"선생님은 열 살 때 집안 형편이 어땠어요?" 수업 후 ‘굿바이’ 인사 대신, 열살 하은이의 질문에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 지금의 내 형편이 아닌 열 살 때를 물어본다. 작은 사람들이 질문하면 되묻게 된다, 질문의 다른 뜻이 있을 것만 같아서. “형편이 좋다는 거 몰라요?” “선생님은 형편이 좋은 줄 알고 살았어. 하은이는 형편이 어때?” “좋아요, 고기를 자주 먹어요” 열 살 때 우리 집 형편이 어땠을까. 지나온 …
금빛 색소폰이 그리워지는 밤, 아련한 추억에 파묻혀 열일곱 살에 국경을 넘은 나는 소프라노 색소폰에, 동생은 알토 색소폰에 끌렸다. 콘서트 밴드 수업 이외에 방과후 활동으로 재즈밴드에서 연주했다. 그때 꿈중에 하나는 어른이 되면 재즈바를 갖는 것이었다. 어린것이 재즈를 듣고 연주하며 한량처럼 살고 싶었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는 모자르트의 말처럼 색소폰은 타국에서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었던 그때 내 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폐로부터 시작…
14년 여름 처음 온 캐나다 동쪽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캐나다 안에 프랑스 문화와 불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게 특별했다. 곧 돌아오리라 아쉬운 마음으로 떠났는데 한참이 걸렸다. 이번 여름 어디서 점이 되어 선을 잇고 별자리 지도를 그릴까 하다 캐나다를 생각했다. 집에 좀 오라는 밴쿠버 계신 부모님 얼굴도 뵙고, 작년 독일 여행의 추억도 달래 줄 캐나다 동부로의 여행. 밴쿠버에서 출발해 오타와, 몬트리올, 퀘백으로 이어지는 이 여행은 이제 것 홀로하는 여행중 가장 긴 여행이 될 것이다.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