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 [안충기의 삽질일기] 허술한 아저씨 ‘냉장고바지’ 입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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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07 23:00 조회1,9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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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바지
A4용지 위에 큼지막하게 써 붙인 문구가 가게 문 앞에 붙어있었다. 날 더워지면 하나 장만해야지 하다가 까먹고, 시장에 가면 생각이 나지 않고, 가을 되면 잊어버리길 몇 년이었다. 매대에 갖가지 무늬 바지가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옷걸이를 뒤적이는데 뒷골이 당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야시시한 옷 주무르고 있는 아저씨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얼른 하나를 챙겼다. 까만 바탕에 아메바 닮은 요상한 무늬가 바글바글 찍혀있었다. 아저씨들은 대개 옷을 대충 산다. 품질을 꼼꼼히 따지지 않고 괜찮아 보이면 그냥 집어 든다. 웬만큼 바가지 써도 모른다. 흥정은 더더구나 젬병이니 옷장사 입장에서는 고마운 봉이다.
1만원을 주니 4000원을 거슬러줬다. 이렇게 싸도 되나. 한잔에 5000원 넘는 커피도 있으니 횡재했다 싶었다. 하나 더 살까하는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까만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 옷을 꺼내 놓으니 아내가 태클을 걸었다.
“이걸 어디에 쓰려고”
“엄청 시원하다고 그래서…”
“집에서나 입으셔. 외출복으로는 좀 그러네.”
엎지른 물이었다. 시험가동 장소로 한밤의 동네공원을 택했다. 속보로 걷는 아줌마, 개 데리고 나온 아가씨, 철커덩거리며 역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아저씨, 맨손 체조하는 노부부, 농구하는 학생들… 공원에 나온 사람들 누구도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괜히 쭈뼛거리던 내가 우스웠다. 아내의 공세도 누그러졌다.
그래도 미심쩍었다. 바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우리 동네는 오천 원인데’ ‘만원에 석장 파는 곳도 있는데, 바가지 쓰솄구만요’라며 계산에 허술한 아저씨를 놀리는 댓글들이 달렸다. 몇몇은 ‘남자들 요즘 많이 입던데요’ ‘아랫도리가 서늘하겠다’며 바지 성능을 예찬했다. ‘싸고 예쁘고 편하고 마구잡이로 일 잘하게 하는 그 옷’ ‘궁둥이에 앉은뱅이 깔판만 장착하면 되겠다’며 노동의욕을 부추겨주는 분들도 있었다. ‘인증샷을 올리시오’ ‘명품바지 입고 사진 찍어 올리지 않으면 사기로 고발하겠소’라며 실물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마음에 쏙 드는 제안도 있었다. ‘시원하고 가볍고 편한 냉장고바지를 삽자루가 원단 디자인해서 세기의 국민바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친구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 SNS의 특성을 알면서도 기분은 나쁘지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찜찜했다. 낮에도 통할까.
냉장고바지를 산 이유는 주말농사 때문이었다. 삽질 호미질 하며 패션을 따질 이유가 없어 그동안은 대충 입고 다녔다. 솔기나간 셔츠나 무릎 나온 바지, 유행 지났다고 애들이 제쳐놓은 옷을 내 다리에 맞춰 가위로 잘라 입기도 했다. 가장 편한 옷은 역시 추리닝이다. 문제는 여름이다. 6월초 아욱 키가 내 허리를 넘어가면 노동은 고역이 된다. 덥다고 반팔 반바지를 입고 일하다가는 풀독이 오르거나 벌레들 밥이 된다. 냉장고바지는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그거 시원하지요?.”
그늘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가 한마디 하기에 돌아보니 밭쥔장이었다. 나와 같은 계열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뒤 냉장고바지는 한여름 내 삽질패션이 됐다. 이제 나는 세상을 냉장고바지를 입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다. 이 바지를 한번만 입어본 사람은 없다. 입고 광화문 한복판을 활보해도 되겠다는 자신감마저 생겼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가게 주인은 노련했다. 실망하는 나를 보고는 울긋불긋한 꽃무늬 바지를 흔들며 요새는 아저씨들도 많이 입는다고 꾀었다. 내가 어리숙해도 그런 눈치도 모를 정도는 아니다. 1차 시도가 먹히지 않자 물량 공세로 나왔다. 이건 탄력이 뛰어나고, 요건 디자인이 잘 빠졌고, 저게 진짜 좋은데 올 여름 유행상품이라 많이 나간다며 주르륵 늘어놓았다. 그래도 주저하자 가게 안쪽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당일 들어온 신상이라고 했다. 아랫단에 고무줄이 들어가 있어 벌레방지용으로 딱이었다. 심하게 동요하는 내 눈빛을 읽은 주인은 남자용 꽃무늬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국방색과 까만색 2개를 집었다. 합쳐 1만원. 또 올게요, 의례적인 인사를 하니 꼭 다시 오란다. 낄낄 웃으니, 올 때까지 기다린단다.
족보가 궁금해서 뒤춤을 뒤집어봤다. 지난해 산 바지에는 ‘SSAMZIE/DESIGN BY KOREA/MADE IN CHINA/폴리우레탄 5% 폴레에스텔 95%/단독세탁 바랍니다’ 라고 쓰여 있다. 한·중 합작이다. 물에 들어가면 염색이 풀릴 수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없었다. 숭례문에서 산 바지는 ‘폴레에스테르 95% 폴리우레탄 5%/MADE IN CHINA’라고 쓰여 있다. 꽃무늬 타령을 했더니, 친구 셋이 서울 봉천동 길거리에서 울긋불긋한 제품을 각각 하나씩 사서 석장을 보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받았다. 한 장에 3000원을 줬단다. 섬유구성비율 표기 없이 ‘MADE IN CHINA’라고만 쓰여 있다.
가만 보니 족보의 충실도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진다. 냉장고바지에도 급이 있는 셈이다. 을지로3가에서 산 첫 바지는 바가지가 아니었다.
냉장고바지는 금세기 들어 내가 만난 물건 중 최고다. 5000원으로 이만한 만족을 주는 상품이 없다. 섬유제품으로는 이태리타월 뺨친다. MADE IN KOREA 제품으로 본격 육성하면 자동차와 반도체를 이을 대한민국 대표상품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름으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냉장고 바지. 듣는 순간 뇌리에 화살처럼 꽂힌다. 절대 잊어먹지 않는다.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던지는 길바닥 제목이다. 얼음바지 또는 에어컨바지라고도 하는데 '냉장고'의 위엄을 따라가지 못한다. ‘ㅇㅇㅇ두마리치킨’ ‘배달의ㅇㅇ’처럼 제목이 쉽고 친근하면 소비자는 지갑을 연다.
2. 아저씨 마음을 잡았다.
패션시장은 아줌마들 판이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보면 안다. 카트를 끌고 아내를 앞서가는 남편은 없다. 남편들은 아내 한 발짝 옆이나 뒤에 붙어 다니는 액세서리다. 옷가게 앞에서는 더 하다. 아저씨들은 문밖에 서서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거나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다. 냉장고바지는 그런 아저씨들을 패션의 중심으로 소환했다.
3. 가성비 갑이다.
한 장에 5000원, 3000원짜리도 있다. 1만 원 정도 마음대로 쓴다고 남편을 닦달할 아내는 많지 않을 테다. 눈치 보지 않고 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가격대비 편의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 더 있다. 물에 넣었다가 널면 햇살 좋은 날엔 노래 몇 곡 들을 시간이면 마른다. 성질 급한 분은 탈탈 털어 그냥 입어도 된다. 세제도 필요 없다. 아내도 생각을 바꿨다. 이제는 외출 때면 더운데 무슨 청바지냐며 ‘땡땡이’를 가리킨다.
냉장고바지 입을 때 주의사항 하나:
얇고 몸에 척척 달라붙어 특수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탄탄한 속옷은 필수.
땡땡이는 일본말(てんてん·點點)에서 왔단다. 맑고 고운 우리말에 정통한 선배가 일깨워줬다. 패션 디자인용어 순화 고시 자료(문화관광부 고시 제1999-27호, 1999년 10월 11일)에는 ‘물방울’ ‘물방울무늬’만 쓰라고 되어 있다. 그래도 땡땡이와 물방울은 느낌이 다른데, 나만 그런가.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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