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 [안충기의 삽질일기] 아저씨가 아줌마를 이길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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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5-17 23:00 조회1,9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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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하게 올라오는 어린채소를 솎는데 밭둑 너머 솔밭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슬슬 다가온다. 하양·노랑이 섞인 털이 반지르르하다. 밭 쥔장 집에 개와 닭은 있어도 고양이는 없고, 집에서 뒹구는 ‘돼냥이’와 달리 44사이즈 몸매로 보아 ‘산냥이’다. 그런데 이놈, 눈을 마주치고도 긴장은커녕 뭘 봐 하는 표정이다. 그렇게 나를 뻔히 구경하다 발라당 자빠지더니 몸을 배배 꼰다. 친구 먹자는 애교인지 등이 가려워 그러는지 모르겠다. 혹 배고프다는 뜻인가 했으나 나 먹을 간식 하나 챙겨오지 않은 터였다. 모른 척하고 일하다 보니 사라졌다.
까치 한 마리도 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지난주에 얼쩡대던 무리 중 하나일까. 꺅꺅대는 품새가 왜 콩을 심지 않았니,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러니, 쩨쩨한 인간 같으니라고 하며 시위하는 것 같다. 너희들은 나를 호구로 보지만 그래도 강아지는 내편이다. 만나기만 하면 꼬리를 1초에 5번씩 흔들고 뒷발로 서서 헥헥 댄다. 보름 전에 밥그릇을 같이 쓰던 제 형이 사라져 외롭기도 할 테다.
씨앗 뿌린 뒤 한 달 정도는 봄방학이다. 5월 중순까지는 채소도 풀도 어려서 별로 손볼 게 없다. 나는 씨를 붓고 웬만하면 물을 주지 않는다. 제힘으로 뿌리내리고 흙 뚫고 나올 수 있는데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어서다. 다른 이유도 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봄비는 서서히 땅을 적셔 흙이 부드럽지만 물뿌리개로 들이부으면 땅거죽이 뭉쳐서 굳는다. 카스텔라 같은 흙 알갱이 사이로 룰루랄라 올라오다가 콘크리트 지붕에 갇혀버리니 새싹에게는 날벼락이다. 오후에 비 온다는데도 아침부터 물을 나르는 근면성실한 분들도 꽤 있다.
몇 년 동안 이 즈음이면 밭에 신경을 끄고 주말새벽에 집을 나섰다. 장비는 자루 서너 개, 전지가위, 작은칼, 얼음물 두 통, 삶은 달걀 다섯 개와 소금이다. 나물 찾아가는 길이다. 주로 쑥을 뜯었다. 동네마다 다르겠지만 중부지방에서는 4월 한 달이 적기다. 산골에서는 5월초에도 거둔다. 이때 잎이 가장 보드랍고 향이 풍부하다. 3월 쑥은 작아 먹잘 게 없다. 5월로 넘어가면 심이 생겨 씹기 힘들다.
신도시에 살 때는 경기도 파주와 연천 지역을 다녔다. 서울로 이사한 뒤로는 강원도 홍천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같은 곳은 두 번 가지 않았다. 지도를 보고 낯선 곳을 찍은 뒤 이 골 저 골을 들락날락했다. 새순이 자라기 시작하는 첫 주에는 수확물이 시원찮다. 셋째 주가 되면 자루가 금세 그득해진다. 운 좋으면 한군데서 자루를 채우는데 온종일 다녀도 봉지 하나 채우기 힘든 날도 있었다.
기록을 들춰봤다. 2010년 5월1일, 해 뜰 무렵에 나서는데 차에서 깡통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염화칼슘에 삭아 구멍 난 배기통 때문이었다. 정비소 문 열기를 기다려 고치고 떠났다. 부가세 포함 19만8000원이 들었다. 가평 설악IC를 빠져나갔다. 장락산 옆구리 널미재를 넘어 강원도 홍천까지 40분 만에 닿았다. 곁길로 접어들어 작은 고개 하나 더 넘으니 좁다란 계곡을 낀 산동네 길곡리가 나왔다. 이정표가 길 끝에 절집이 있다고 알려준다. 느릿느릿 걷는 촌로들을 지나 올라갔다. 동네 끝에서부터는 비포장 길이다. 같은 동네서도 계절 차 때문인지 여기서부터는 논밭을 아직 갈지 않았다. 비탈 밭에 솜털 뽀송뽀송한 참쑥이 와글와글 했다. 눈 녹은 물이 졸졸 흘러드는 논가에는 밭미나리가 오글오글하고 그 사이에서 청포묵 같은 도롱뇽알이 흔들렸다. 청개구리는 햇빛 쐬며 느긋했다. 논둑에 새털이 흩어져 있어 살펴보니 독수리나 매에게 먹힌 새의 흔적이었다. 깃털로 보아 꿩은 아니었다.
실전 노동은 만만찮다. 자세는 시간이 갈수록 겸손해진다. 허리 숙여 일하다가, 쪼그려 앉았다가, 무릎걸음을 하다가, 해가 기울 무렵에는 주저앉아 엉덩이를 밀고 다닌다. 종아리가 뭉치고 목과 등이 굳어 결국엔 드러누워 쉬다가 짐을 싼다. 화사하게만 보이는 산과 들도 내편이 아니다. 이맘때면 사이비나물이나 짝퉁 버섯 먹고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꼭 나온다. 옻이 올라 헐크가 되는 사람도 있다.
2011년 5월 7일, 홍천강변을 오르내릴 때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물었다.
“나물 뜯으세요? 여기 분이 아니네요”
“네. 물 맑고 산 좋고 동네가 아늑하니 좋네요”
“다음 주에 여기 나무에 약 쳐요.”
“아, 네…”
지나오면서 이미 약 친 밭의 쑥을 뜯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나물은 더 하다. 진달래꽃잎은 먹을 수 있고 영산홍과 철쭉꽃의 독성은 대개 안다. 그런데 다음을 보자. 이 풀들은 형제처럼 닮았다. 앞이 먹는 나물이고 뒤가 독초다.
머위/털머위, 곰취/동의나물, 잔대순/냉초, 당개지치·참나물/미치광이풀·삿갓나물, 산마늘·둥글레/박새·여로·은방울꽃, 우산나물/삿갓나물, 참당귀/개당귀, 삼지구엽초/꿩의다리, 미나리/독미나리·나도독미나리, 칡뿌리/자리공뿌리
이름은 들어봤지만 현장에서는 나도 구별 못한다. 동의나물·삿갓나물은 독초인데 ‘나물’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우산나물은 먹고 삿갓나물은 못 먹는데 우산나물을 삿갓나물이라고도 부른다. 여로·은방울꽃처럼 이름 예쁜 풀이 사람 잡을 수도 있다니 무섭다. 그래서 나는 민들레·씀바귀·냉이·고들빼기·돌나물·도라지처럼 아는 풀만 뜯는다. 나물 많은 땅은 따로 있다.
아저씨들은 죽어라 길을 묻지 않는다. 산이나 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될 텐데 감만 믿고 돌아다닌다. 나도 그랬다. 몇 번을 허탕치고 물어보면 아까 지나온 데가 나물 밭이다. 어디 가면 동네사람들에게 고개부터 숙일 일이다. 꾸벅하고 말을 붙이면 피와 살이 되는 정보가 줄줄이 들어온다. 모르면 바로 묻는 아줌마들은 그래서 경쟁력이 있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최영준 농부 댁에 들렸다. 역사지리학자로 고려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분이다. 오십 줄에 들어서던 1990년부터 홍천강변에서 주말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엔 차량은커녕 농로 2㎞를 걷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 다시 1㎞ 정도 고개를 넘어가야 겨우 닿는 곳이었다. 진짜 농사를 지으려 일부러 궁벽한 산골을 택했다. 친지나 친구들의 조롱도 받았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금토일 사흘은 오로지 농사를 지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치밀하게 기록했는데 그 일부를 우연한 기회에 한길사 무크지 『담론과 성찰』(2009.8)에 실었다. 의외로 반응이 뜨거워 일기를 추려 684쪽 짜리 책으로 엮었다.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한길사. 2010)은 난중일기체로 써서 힘이 넘친다. 2009년 4월 10일 기록은 이렇다.
“면사무소에 들러 전입신고를 마쳤다.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이 권해온 일을 이제야 마쳤으니 그들도 환영할 것이다. 서울특별시에서 강원도로 바꾼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받아들고 강원도 도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고 다짐해보았다.”
읽으며 배운 점이 많아 인사드리고 싶어 들렀다. 키 큰 나무와 꽃무리 속에 파묻힌 농가였다. 소박하지만 오랜 시간 가꿔온 정성이 배어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대문이 닫혀 있어 불러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책 잘 읽었다는, 고맙다는 말을 메모해 놓고 왔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지방에 일이 있어 다녀왔단다. 다시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지금껏 지키지 못했다. 건강하신지 궁금하다.
홍천 이후로는 이러저러한 일로 다니지 못했다. 올해는 모처럼 가평을 다녀왔다. 함께 장을 담가먹는 친구 농막 주위에 산나물이 지천이라는 말을 듣고서다. 철이 살짝 지났는데 산골이라 아직 나물이 남아있다. 가죽나무순과 두릅은 익숙하지만 전호·다래순·섬오가피순은 처음 먹어봤다. 봉지 그득 채운 나물이 혹시 독초인 산괴불주머니나 미나리아재비가 아닐까 걱정했더니 친구가 전호라고 합격판정을 내렸다.
오월이 지나며 얼굴과 손이 점점 까매진다. 젊어서는 꺼렸는데 이제는 훈장이라 여긴다. 내 꼴을 본 친구가 묻는다.
“자치기 하러 다녀온겨?”
골프도 좋지만 난 보다 재미있는 일이 쌨고 쌨다.
그림·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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