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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책 속으로] 파리 뒤흔든 테러 … 그 역사적 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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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18 17:48 조회3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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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984쪽, 4만3000원


중동의 피냄새가 급기야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의 신문사 편집국과 식료품점까지 스며들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워싱턴에 이어서다. 오늘날 중동 문제의 근원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지목하는 사람이 많다. 종교와 역사가 다른 유대인이 중동에 유대국가를 세우고 팔레스타인 주민을 내쫓으며 박해한 것이 분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 저술가인 지은이는 그보다 앞서 1922년 서구 열강이 현대 중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갈등의 원천을 찾는다. 사우디 아라비아·이라크·시리아·요르단 등 중동국가의 대부분은 그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서구 열강, 특히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뒤 패전국인 오스만 튀르크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이들 나라를 억지로 만든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의 모순과 오해, 숨은 의도가 중동의 끝없는 전쟁과 70년대 이후 테러리즘이 격화한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1910년대, 요르단 지역 계곡을 달리는 영국군 낙타부대의 모습. 저자는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오스만 튀르크를 해체하는 과정을 분석하며 오늘날 중동분쟁의 씨앗을 새롭게 조명했다. [사진 갈라파고스]
1차대전 패전 직전까지 중동을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도는 복잡한 모자이크 국가였다. 민족이 20개가 넘었으며 언어도 터키어·셈어·쿠르드어·슬라브어·아르메니아어·그리스어 등 각양각색이었다. 지금은 아랍인으로 통칭해 부르는 이집트인·아라비아인·시리아인은 역사·인종 배경은 물론 사고방식도 달랐다. 유일한 공통점 이 이슬람이었다. 오스만은 사실상 이슬람 신정국가였다. 군주인 술탄은 수니파 무슬림(이슬람 신자)에 의해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세속적·종교적 계승자인 칼리프로 간주됐다. 하지만, 시아파를 포함한 71개 이슬람 타종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술탄을 적대시하기까지 했다. 인구의 25%는 기독교·유대교 등 비이슬람이었다. 종교는 오스만의 통일이 아닌 분열과 내부 갈등, 심지어 적개심의 원천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이런 튀르크를 1차대전 직후 왜 굳이 해체하려는 생각을 했을까. 민족자결주의라는 고매한 이상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지은이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파고든다. 바로 1908년 청년튀르크당 혁명으로 오스만의 권력자가 된 된 엔베르 파샤가 범튀르크주의·범우랄알타이주의·범투란주의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터키어 사용지역으로 오스만 세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이다.

실제로 엔베르는 1918년 이슬람군을 결성해 1차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세력 공백상태가 된 카프카스의 바쿠로 진군했다. 1918년 3월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 남부 영토를 차지한 튀르크 동맹국인 독일조차 이런 엔베르의 행동에 당황했다. 영국은 경악했다. 오스만 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면 인도도 위험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이 지역은 중동보다 먼저 석유가 발견된 유전지대였다. 영국 해군은 당시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의 제안으로 함선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꾼 직후였다. 영국 입장에서는 이런 튀르크를 대전이 끝난 뒤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영국은 새롭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소련도 경계했다.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토착민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내 번복하고 다시 점령했다. 영국은 이를 보고 볼셰비키가 새로운 러시아 제국주의자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영국의 오스만 해체에는 볼셰비키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을 넘보지 못하도록 그 지역에 친영·친서방 정권을 세우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문제는 튀르크를 해체하고 새 나라들을 세우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려고 해도 그 민족이란 게 중동에선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특히 아랍어로 이라크라고 불린 메소포타미아의 내부 민족·종교·종파 구성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여기에 개의치 않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는 끝없이 반목했지만 이는 무시됐다. 북부 모술의 쿠르드족은 아랍인의 통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영국은 전략물자인 석유가 있다는 이유로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게 했다. 주민의 75%는 정부에 복종해본 적이 없는 반독립적인 부족민이었는데 폭군이 하나 제거되면 또 다른 폭군이 들어서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이유로 아랍인 지배자를 두는 데 반대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국은 서로 반목하는 이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 이 지역 출신도 아닌 파이살에게 넘겨줬다. 아라비아 반도 메카 출신으로 1차대전 중 오스만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켜 영국을 도운 하심 가문 출신이다. 이 왕조는 1958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에 넘어갔다. 그 군사정권의 마지막 ‘폭군’이 사담 후세인이다. 이라크의 모순은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 1979년이 아니라 이미 1922년부터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폭군의 악순환’이라는 당시 부족민의 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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