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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 30. 소통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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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7-15 15:36 조회3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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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헤치며 돌아온 집은 초상집이 아니라 숫제 잔칫집 분위기였다.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까느라 분주한 남정네들과 마당가에 솥두껑을 걸어놓고 전을 부치는 아낙네들, 물색 모르고 활활 타는 화톳불 언저리를 맴도는 아이들로 북적댔다. 마당이 수선스러운데 반해 상청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 많은 자손들이 다 어디 갔는지 큰오빠 홀로 굴건제복을 입고 죄인처럼 서있었다. 방랑객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엎어지면 코 닿는 데 사는 작은아버지까지 기척이 없는 건 남사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의 말마따나 '재산 가면 사람 발길도 끊긴다'는 게 맞는 성 싶었다. 세상 인심보다 앞서 변하는 게 자식들 태도였다. 빈한하고 삭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조가 생겨났다. 노인을 유통기한 지난 상품처럼 폐기처분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속도와 효용만 앞세우는 산업사회, 경제적 가치만 따지는 자본주의 풍토에 핀 독초였다. 
        
틀림없이 할아버지의 작은아들과 딸들은 오늘밤 편한 잠자리에서 푹 자고 일어나 장례식 직전에 나타나 대성통곡을 하며 애통해 죽겠다는 연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선 장례식 마치자마자 골동품 하나씩을 들고 총총히 사라지겠지. 여느때처럼.
        
그러나 그네도 그런 가족들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그네 역시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기보다는 솔숲과 엄마를 지켜줄 버팀목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당혹해 하고 있으니까. 
        
대문 밖에 걸린 조등만이 미수(米壽)를 살다간 한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네는 상복을 입고 큰오빠 곁에 섰다. 하나보다는 둘이 서있는 게 덜 스산해 보였다.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그때도 작은오빠는 친구들과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하느라 상청에 들어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 장례를 치르고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비쭉 나타나 엄마 없는 빈 방에서 하룻밤자고 바람처럼 휙 사라졌었다. 큰오빠와 그네 둘이서 그때처럼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향불 매캐하고 삼베옷 꺼칠거렸지만 모처럼  큰오빠와 있는 오붓한 시간이 좋았다.
        
둘다 아무 말이 없었다. 간혹 시선이 교차할 뿐. 그래도 오빠의 마음이 다 읽혔다. 힘들지 않아? 많이 핼쑥해졌구나. 좀 쉬지 그러니? 그네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가 그네의 손을 꼭 잡았다. 

검은 양복 입은 조문객들이 줄지어 상청에 들어섰다. 다가오는 손님과 맞절을 하고 형식적인 애도의 말에 고개 숙여 고맙다는 말을 하고 보내기를 로봇처럼 되풀이했다. 새벽녘이 되자 조문객들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얼굴을 인식할 수 없는 검은 형체가 그네 앞에 나타났다가 스르르 미끄러져 갔다. 그네의 몸이 모래성처럼 서서히 허물어졌다.
 
참 편안했다. 알탕갈탕 애끓이는 것도 없이, 팽팽하게 잡아당긴 고무줄같은 긴장도 사라졌다. 까만 포대기에 싸여있는 것 같은 나른함에 젖어있는데,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극도의 긴장이 준 일시적 심장발작이야. 혹시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가족 중에 심장병력이 있는 분이 계셔, 형?”“없는 걸로 아는데, 심각한가? 외국에 살면서 몸을 너무 혹사했나 봐.”

“일단 안정을 취하고 사나흘 후 정밀검사를 해보자구. 눈치껏 해요. 형도 무리하면 안 되잖아.    아흔 가까이 사셨으니 호상인데 뭘. 내일 오리다.”
       
의사가 떠났다. 큰오빠가 그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 자리를 떴다. 휴, 다행이다. 마당에서 쓰러졌으면 빠글이 아줌마가 낮엣일 나발 불어 병원으로 끌려갈 뻔했다. 그랬으면 영낙없이 중환자 취급 당할 뻔했다. 

독한 향냄새에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밤낮을 가리지않고 달려와 그리 오래 벌을 섰는데, 기관차인들 견디겠어? 조금 쉬면 되는 걸 돌팔이 의사가 호들갑을 떤다며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묵은 고서들이 촘촘하게 꽂힌 서가가 벽에 기대어 서있다. 반대쪽 벽에는 옥빛 두루마기와 통영갓이 걸려 있었다. 머리맡에는 할아버지가 쓰던 앉음뱅이 책상이 밀쳐져 있고, 그뒤 넓은 창 아래 오동나무 문갑이 누워있었다. 

어느 집에나 한둘씩 있는 통영 명물 나전칠기 하나 눈에 띠지 않았다. 방안 집기는 주인 성품처럼 조촐하고 질박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그윽했다.
         
소박한 문갑 위로 파아란 하늘이 열리면서 흰 뭉게구름이 후루룩 날아 들었다. 그네가 일어나 앉았다. 하늘이 금세 허리를 낮춰 건넛산 초록 능선에 걸터 앉았다. 창 앞으로 다가섰다. 하늘과 산과 갯벌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생 궁벽한 어촌에 박혀 사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큰 창을 통해 산과 들, 바다와 하늘을 빌려다가 마음에 심어두고  대자연과 소통하며 살아왔음을, 할아버지의 순응하는 지혜와 바다와 같은 평화는 바로 창밖 경치 덕분이었음을 깨달았다. 차경(借景)은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누린 호사였다.

윗목에 밀려간 서안을 끌어당겼다. 초서체로 흘려쓴 책 한 권이 얹혀 있었다. 책장을 휘리릭 넘겨 보다 갈피에 뭔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길다란 한지 봉투였다. 속이 궁금했다. 하지만 열어봤자 한자 까막눈인 그네가 내용을 알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솟구치는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유산 상속일까? 처리 못한 채무관계일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놓을 수 없었던 건 도대체 뭘까? 그네는 마치 관뚜껑을 열듯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설형문자 같은 한자일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 뜻밖에 눈앞이 환해지는 궁서체 한글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에겐 진서인 한자를, 손녀들에겐 언문인 한글을 가르쳤다. 진서를 다 익혔으면서도 아버지는 여자들이나 쓴다는 한글을 즐겨 썼다. 한글꼴이 예술적이어서 아이디어가 생명인 온갖 도안을 다 소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큰아 보아라.

내 가장 애통한 것이 널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다.
지아비로서, 아비로서의 소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세우고 그것에 평생 매진함이 대장부의 인생 경륜이거니와 너는 시절이 준 역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생을 허랑하게 보내니 내 천추의 한이로다.
더이상 부운처럼 떠돌아 다니지 말고, 네 평생 소원이던 영상미학에 매진하거라.
       
네가 가장 빛났을 때가 영화를 찍을 때였다. 그리고 네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도 네 영화가 읍내 극장에서 상영될 때였단다.

못난 아비를 용서하여라.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네 방황의 근원이 나의 무지에 있었음을 깨달았구나.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이나마 영상관을 만드는 데 보태거라.
단, 송림만큼은 소희를 위해 남겨두거라.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식과 소통하고자 하는 애절한 부정이 구절마다 맺혀있었다. 그네의 소망을 지켜주라는 당부에 그만 당겼던 울음줄을 놓아버렸다. 언제 피맺힌 통한의 심정을 써두었을까, 아들이 언제 돌아와 저 유서를 본다고. 아들이 싫어하는 진서를 피해 그다지도 가벼이 여기던 한글로 편지를 쓰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네는 소통의 창 앞으로 나아갔다. 창틀이 다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바다를 물고 있었다. 다홍 물결이 창을 건너 그네 가슴까지 넘쳐 들었다. 붉은 햇덩이가 불쑥 솟구쳤다. 슬픔과 어둠을 다 살라먹을 듯이 이글거렸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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