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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 38. 슬픈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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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23 10:18 조회3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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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아래 휴지처럼 구겨져 있는 카메라 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 크게 손상을 입지 않았다. 

거친 세월 넘나드느라 여물어진 덕분인 듯. 마땅찮은 건 싹 지워버리는 고장난 그네 뇌보다 단단하고, 진실까지 왜곡시키는 미디어보다 훨씬 순박해서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분노와 울분이 누워있는 침상과 슬픔과 연민이 가득한 눈동자들을 찍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항의를 하거나 카메라를 피하는 이도 없었다. 함께 짓밟히고 쫓기면서 동지의식이 생겨서였을까.  

카메라 렌즈가 설재희 침상에 이르자 그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기념촬영이라도 하듯 환하게 웃었다. 차마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우물처럼 깊은 눈 뒤에 고여있는 슬픔을 눈치채 버렸기에. 대신 테이불에 기대어 서있는 하얀 지팡이와 검은 안경의 모순적 동행을 담았다.

“당신도 불편한가요, 장애자 보는 게?”

“아 아니… .”

날카로운 그의 힐난에 당황한 그네가 말을 더듬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박애주의자처럼 연민의 눈길로 보는 것보다 낫네요. 시선을 피하는 게.”

그의 입꼬리가 매달려 올라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이었다.

“천만에. 도큐멘터리의 생명은 대낮의 햇살 같은 투명한 시선이죠.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끼어들 틈이 없는. 심지어는 제작 의도마저 배제된. 관객 앞에 팔딱팔딱 뛰는 날것을 던져 놓으려구요.”

“그런 맹물 같은 영화에 관객이 꼬일까?”

“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과연 예술성 높은 작품일까요? 상업화 대중화된 영화는 남들이 다 찍으라죠. 내 몫은 관객을 진실의 문 앞에 안내하는 것, 그리고 해석과 평가는 관객의 몫이죠.”

“진실? 진실이라… . 갈대처럼 출렁이고 남비처럼 금방 달아올랐다 금세 식어버리는 대중에게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소? 진실은 저들에게 훌훌 벗어버리고 싶은 남루한 과거 같은 거라오.  대중은 늘 달콤하고 보드레한 쵸콜릿을 원하지. 순간 쾌락에 빠지는 필로폰 같은 마약이면 더 좋고. 자 봐요! 과연 저들이 당신의 그 불편한 진실을 보고 싶어하는지.”

그의 일갈은 회초리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병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커튼 벌어진 틈으로 깃드는 미명을 제외하곤 병실 안은 아직도 침침했다. 어스름 속에 침상에 앉아 TV를 보고있는 환자들의 모습이 홀로코스트 같았다. 낡은 흑백영화 같은 병실에 모닥모닥 말소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저 쳐죽일 인사들 좀 봐.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저기까지 내려와서 한다는 짓이 한가하게 시나 써? 어째 나랏일한다는 사람들이 저러까, 응?”

“그렁게 말이여. 아, 일찍만 출동했이먼 다 구헐 수 있었다잖여. 구신들은 뭐항가 물러.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애꿎은 애기들만 델꼬 갔잖여.”

“때려죽일 놈은 선장놈이야. 어떻게 저만 빠져나올 수 있어? 승객들을 물폭탄 터지는 배에다 남겨둔 채로.”

“가 가만 대통령이 나와서 뭐라고 하는구먼. 조용히들 해보드라고. 우리 대통령이 욕보는구만. 세상에 대통령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참 운도 지지리 없제.”

“글씨 말이여. 잘못은 아랫놈들이 다 허고 죄는 대통령이 다 뒤집어 쓰는 거 아니여? 어려서 엄마 잃고 아부지마저 비명에 가고…. 참말로 고단헌 분 아닝가벼. 시집도 안 가고 자나깨나 나랏일만 보는디.쯧쯧.”

차츰 더 많은 홀로코스트들이 대화에 끼어들고, 자분자분하던 말소리가 차츰 높아져 격한 토론이 되어갔다.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니제. 지금 사고가 한두 건이여?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보고 뭐라는지 알어? 사고공화국이래. 그것이 어째 아랫사람들 탓만 되겄어? 당연히 나라 수장 탓이제. 예로부터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혔어. 그 징조가 하나둘 나타나잖여? ”

“그러까? 그럼 우쨰야 혀? 푸닥꺼리를 해야 할꺼나. 허기사 물에 빠져 죽은 구신은 꼭 가족인 친구 하나씩 물고 들어간담서. 진혼제는 허긴 해야 쓰겄제?”

“쓸데없는 소리!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인데 밀어줘야지. 대권이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리는 거야.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당, 아니 여당을 팍팍 밀어줘야 해. 단합된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금 고소해 하고 있을 이북놈들한테. 나라가 어쩔라고 이러는지 몰라. 빨갱이들이 온데 다 파고 들었으니… .”

“맞어, 빨갱이 국회의원도 있담서? ”

그의 예언이 적중하고 있었다. 왜곡된 언론에 오래 길들여진 홀로코스트들의 난상토론이 격해질수록 카메라를 든 그네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통쾌할까? 그네가 안개 자욱한 환상의 섬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뭍에 배를 대는 게. 그를 건네다 보았다. 웬일로 그의 표정도 그네만큼 어두웠다.

“이제 시원하세요? 두메산골 촌색시가 코 베어가는 서울에 와서 어쩔 줄 몰라하는 꼴을 보니까?”

“그래 보여요?”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들릴듯 말듯 혼잣말을 했다.

“ 후, 저게 우리의 슬픈 자화상인 걸. 사건이 터지면 진실도 사실도 외면하고 서로의 탓만 대다가 빨갱이라는 금기어가 튀어나오면 급기야 모든 논쟁이 마감되는… . 옳고 그름보다 정이 앞서는 이 작태가 언제나 끝날지… . ”

‘부역자’라는 주홍글씨를 평생 달고 살아야 했던 할아버지의 옥색 두루마기 자락이 눈앞에  펄럭였다. 밤손님처럼 어둠을 타고 다녀가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평생 선산의 굽은 소나무처럼 고향을 지키고 있는 큰오빠의 모습이 설재희의 실루엣에 오버랩되었다.

허수아비처럼 앉아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살그머니 다가가 그의 헛헛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새벽이슬에 젖어 축축한 아버지의 등을 다독였다. 소나무 껍질처럼 꺼칠꺼칠한 큰오빠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네는 시절에 쫓겨 제 몫의 삶을 살아낼 수 없었던 초상화들과 길고 긴 화해를 했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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