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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 39. 북서풍이 불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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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30 11:50 조회3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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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문 앞에 장난감 병정처럼 서있던 전투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애띤 얼굴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눈길에서 강한 적의를 느꼈을까? 잔뜩 겁 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소희라는 분이 계십니까?”

설재희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게 거북해 얼른 일어나 전경에게 다가섰다.

“네, 전데요. 무슨 일로?”

“어떤 분이 면회를 오셔서… .”

‘면회’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문병’이라는 표현이 옳으련만 ‘면회’라니? 무심코 고른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단어가 던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곱씹었다. 입 안이 씁쓰름했다. 

병실 유리창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짐작이 안 갔다. 그네는 설재희 쪽을 돌아보았다. 왜 그는 붙잡지 않는 걸까? 그걸 의아로워하는 자신은 왜또 그의 곁에 남아있다 하지 못하는가? 어쩌다 그들은 어긋난 인연이 되어 갈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나뒹굴게 되었을까.
 
그에게서 시린 눈길을 거둔 그네가 문고리를 잡고 망설였다. 이 문밖에 나서면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 그를 꼭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터…. 망설임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건 비단 그네뿐이 아니었다. 그네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설재희와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 또한 영겁만큼이나 긴 찰라의 무게에 답답하고 초조했으리라.

망설임을 끝낸 그네가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덩치 큰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네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빠르게 말했다.

“내 말 잘 들어요. 여기서 빠져 나가려면 내가 시킨 대로 해요. 그 카메라를 내게 넘기고, 저들이 묻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해요. 절대로 저들을 도발하는 행동이나 말을 해선 안 돼요. 알겠죠?”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찬우아빠였다. 하도 다그치는 바람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솜털 보스스한 전투경찰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작은 사무실이었다. 의외였다. 

사무실은 조촐하고 간결했다. 얼마 후, 제복입은 남자가 나타나 건조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고 타이핑을 한 서류를 내밀며 사인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가라는 듯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너무 싱거웠다. 영화에서처럼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취조실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고문기술자도 아닌 게 의외였다. 뭘 기대한 거야? 스스로가 어이없어 픽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게 거슬렸을까?  제복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지금 상황이 웃깁니까? 잘난 부모 만나 물 건너까지 갔으면 거기서 잘 쓰고 잘 놀지 왜 돌아와서 난동을 피웁니까? 안 그래도 북풍 땜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해외유학파까지 합세를 해? 인제 북서풍이 불겠구만. 이봐요. 아가씨, 재벌집에 시집가서 호사하려면 이런 험한 데 들락거리면 안 되지.”

얼음 송곳을 꽂은 듯 온 몸이 꽁꽁 얼어버렸다. 호통에서 시작해서 잘근잘근 껌 씹듯 하는 혼잣말,  가래뱉듯 던지는 건달의 말투까지 하도 변화무쌍해 다중인격체를 보는 것같았다. 서둘러 건물을 빠져 나왔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찬우아빠가 그네의 기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자, 어서 떠나요. 여기 비행기표와 필요한 것들 대충 챙겨 넣었으니.”

“아버님 덕분에 전 무사히 나왔지만 뒤에 남은 분들은 어떻게 돼죠? 무고한 시민들인데, 미디어가 시국사범으로 몰아간 거잖아요. 그걸 밝힐 증거가 제 카메라에 들어있어요. 돌려 주세요. ”

“안됩니다. 그 사진기가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어요. 모르겠어요? 지금 거센 돌풍이 일고있는 걸? 회오리바람이 불면 납작 엎드렸다가 바람이 지나면 그때 몸을 일으키는 거예요.”

“지금 어느 땐데 북풍, 북서풍 타령인지… .”

“독재정권 때는 돌풍의 진원지가 한 군데였지만 지금은 사방팔방, 시도 때도 없이 소용돌이바람이 일어요. SNS가 한 몫을 하는 거지만. 못 봤어요? 천안함 사건 때 북한의 도발에 온 국가가 패닉에 빠져있는데도 남측의 북한 몰아붙이기다 어쩐다 하는 역풍이 일었던 걸?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요. 모두들 눈뜬 소경, 가는귀 먹은 청맹과니가 되었다니까요. 이런 판국에 당신의 카메라가 사람들의 귀와 입을 열어줄 듯싶어요?”

“찬우아버지는 사회적 정의감이란 눈꼽만큼도 없는 분이군요. 난 그럴 수 없어요. 밝혀 내고야 말겠어요.”

“양심과 정의, 도덕과 희망이란 단어는 집단 이기주의에 묻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어요. 고집 피우지 말고 어서 떠나요.”

맞다. 그네가 떠나려면 바로 지금. 철새가 여름을 나고 월동지로 가려면 북서풍을 놓치면 안 되었다. 돌연히 인 바람이지만 이 바람을 놓치면 그네는 떠돌이 텃새가 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발 돌아가서 우리 찬우를 돌봐줘요. 내가 당신의, 그 잘난 사회적 정의감을 솟대처럼 들고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그의 애절한 눈빛이 그네를 움직였다. 아니 그의 부정(父情)을 핑계로 자신없는 낡은 기치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넨 민족과 국가를 위해 횃불을 드는 애국지사가 아니었다. 또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앞장서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촛불처럼 제 몸을 태워 주의를 환하게 밝혀주는 박애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남에게 폐나 끼치지 않고, 부정한 일을 보면 주먹총 한 번 놓는, 소심하고 평범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할 사람들에 대한 의리와 양심 때문에 한껏 객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치기어린 모습이 부끄러워 찬우아빠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찬우아빠가 꾸려준 가방 하나를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 공항은 철이른 단풍으로 울긋불긋했다. 산뜻하고 발랄한 원색의 옷차림에 모자와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부린 여행객들이 공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숙하는 분위기라 여행업계가 난항을 겪고 있다는 보도와는 달랐다.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지. 도망치다시피 떠나는 자신과 울적한 마음을 잠시 달래려 길을 나서는 저들이 다를 게 뭔가? 그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맺혔다. 

비행기가 쿨럭거렸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래 먹구름이 울컥울컥 피어나고 있었다. 먼지 가득한 대기권을 벗어나 상층권으로 집입하려는 비행기의 몸부림 탓일 게다. 얼마 안 있어 어둠이 배제되고, 고통을 거세시켜 버린, 백야의 세상에 닿겠지.

그네는 옷섶에 묻어온 갈등과 죄절, 삶의 애환과 번민의 검불을 톡톡 털어냈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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