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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 - 40. 점토빛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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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0-13 09:20 조회3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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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의 하늘은 푸르고 싱싱했다. 거친 외풍을 맞은 적 없어 늘 고요한 버라드 내해처럼.

궁핍과 갈등 같은 건 발 붙이지도 못할 것 같은 풍요의 땅, 천당 바로 아래 99당이라는 밴쿠버에 비행기가 착륙할 즈음, 그네는 흙먼지처럼 이는 잔고민에 빠졌다. 지치고 고달픈 몸으로 언니 집에 곧장 가는 게 싫었다. 겨우 털고 온 혈육과 고향에 대한 애착, 미련 등 비문명적이고 단세포적인 감상의 우물에 또 빠지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고 집으로 가자니 찬우 아빠의 애절한 눈빛이 목엣가시처럼 걸렸다.

어디를 가도 인간은 고민하고 갈등하기 마련. 인간이 사피언스인 한, 인간과 인간이 엉크러져 사는 한. 그래도 아직 사람을 떠나 외로운 섬처럼 살 자신은 없었다. 비록 크고 작은 집합의 경계에서 서성대지만 그래도 인간사회의 범주 안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러고 보면 그네는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인간 관계를 싫어하는 것이었다.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저런 인간과 무작위로 엮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 연유는 그네의 생래적인 낯가림 탓도 있겠지만 그네가 살아오면서 맺은 인간관계가 그다지 행복하거나 유쾌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상기된 볼과 반짝이는 눈길들이 그네를 훑고 지나갔다. 저 눈빛과 저 기대를 받는 이는 얼마나 흐뭇할까? 기다림이란 단어가 공항에서만큼은 궁상을 떨치고 설레임의 옷을 입는다.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그네도 버릇처럼 두리번거렸다.

“여기 여기요.”

손을 번쩍 들고 팔짝팔짝 뛰는 아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가와 손을 맞잡는 찬우를 보며 “어? 찬우가 웬일?”시크하게 물었다. 반가움을 감추려는, 그네 나름의 대처법이었다.

“웬일은요? 아빠가 알려줬죠. 이모 오는 날짜. 근데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찬우도 반가움을 투정으로 풀었다. 이 아이 역시 제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그네처럼. 이때 그네의 손에서 슬그머니 가방을 빼앗는 손길이 있어 쳐다보니 큰 키의 청년.

 “웰컴 홈.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길다란 장대 끝에 금빛 해바라기 미소를 품은 미스터 빈, 아니 미스터 빈이라는 커피가게의 주인 제이콥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같이 나왔느냐구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먼저 당신 할아버지의 죽음, 많이많이 미안해요.” 그가 그네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를 했다. 그러자 찬우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듯 카트 위에 찬우를 덥석 앉히곤 요리조리 인파를 헤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도 그네는 어리벙벙했다. 만날 확률 제로인 이들이 어떻게 나란히 마중을 나오게 되었지? 탁 털어놓지 않는 게 더 궁금증을 유발했다.

그의 자동차는 그의 긴 몸을 종이처럼 접어 넣어야 할 만큼 작고 앙증맞았다. 찬우가 ‘미니 쿠퍼’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차종도 몰랐을 것이다.

조수석에 앉은 찬우가 요것조것 만지작거리며 그의 운전을 방해했지만 그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젊은 아빠와 조숙한 아들, 혹은 듬직한 맏형과 철없는 막내동생 사이처럼 죽이 잘 맞았다. 

자동차가 그랜드빌 가를 따라 내려가다 2가로 돌아들었다. 컨테이너 같은 네모진 건물이 늘어선 공장지대가 나왔다. 사계절 내내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그랜빌 섬 지척에 이리 한산하고 후미진 동네가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어디로 가요? 언니네 가는 길도 아닌 듯싶은데?”

“지금 우리집으로 가고 있어요. 불안해요? 내가 당신을 납치라도 할까 봐?”

“아, 아니요. 근데 왜 당신 집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눈을 가린 채 낯선 은하별로 끌려가는 것 같아 잔뜩 긴장이 되었다. 곁에 찬우가 있어도 이미 한 패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네가 없는 사이 뭔가 얄궂은 일이 일어났던 게 틀림없었다. 답답했지만 운전하는 그를 채근할 순 없어 손가락만 잘근잘근 씹었다.

“응, 이 형 집에 우리 다같이 살아요. 거기가 우리 쉘터잖아요.”

찬우가 장난처럼 훅 던진 ‘쉘터’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쉘터? 비상 대피소 말야? 그게 무슨 말이니? 찬우야.”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대요. 다 왔어요. 가서 보면 금방 알아요. 근데 형네 집 댑다 좋아요. 벽도 다 유리로 돼있어서 거리가 훤히 다 보이고, 이층침대랑 소파, 의자가 다 SF영화에 나오는 것 같애요. 꼭 내가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톰 크루즈 같다니까요. 완전 짱이예요.”

찬우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그의 집자랑을 하는 동안 그네의 머리는 미스터리를 푸느라  분주했다. 언네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찬우가 제이콥 집에 머물 이유가 없지. 폭발한 걸까? 그렇다면 언니가 확실한 증거를 잡았어야 되는데. 어설프게 잡들이려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볼 텐데. 수컷의 질주 본능은 윤리 규범이나 아내의 눈물 따위에 멈추지 않으니까. 그 능구렁이는 경제적 풍요와 안락함에 길들여진 언니가 쉽게 이혼하지 못하리라는 것까지 간파했을 테니. 그러면 군식구들 때문에 분란이 난 걸까? 수시로 드나드는 동생과 찬우가 사단의 원인이 될 수도… . 여기까지 추리하곤 더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찬우와 그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행동반경을 아무리 그려보아도 둘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꼬마자동차는 오래된 선물 포장 같은 이층 건물 앞에 멈췄다. 담쟁이 덩굴손이 붉은 벽돌 틈새를 마구 공략하고 있었다. 

건물은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겉모습은 퍽이나 고풍스럽고 운치있었다. 안에서 꼬마들이 우루루 뛰쳐나와“이모, 이모.”를 외치며 그네 품에 안겼다. 애벌레처럼 고물거리는 아이들을 안고 이층을 올려다 보았다. 커튼 한 켠이 풀썩 들리며 사람 모습이 얼핏 스쳐갔다. 

머리에 둥근 터번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가 그네 품에서 아이들을 건네받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낡은 철제 계단이 비명을 질렀다.

두툼한 문 앞에 이르렀다. 그 너머에 어떤 삶의 캔버스가 놓여 있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찬우와 아이들의 눈길이 그네에게 쏠렸다. 그 눈빛이 “자, 새 세상으로 드는 문을 여세요!”하며 그네를 재촉하는 듯했다. 거기에 힘입어 무거운 문을 밀쳤다.

빛이 왈칵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집안이 불꽃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눈속을 파고드는 불꽃의 정체는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는 저녁놀의 군무. 온 집안이 바알간  점토빛이었다. 마치 멕시코 풍의 대형 걸개를 걸어놓은 듯.

그네는 전율을 느꼈다. 어느 새벽의 여명보다, 어느 파릇한 젊음의 순간보다도 더 검질긴 생명력이 솟구쳤다. 그네는 예감했다. 이곳이 아이들과 더불어 지친 나래를 쉬는 둥지가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은빛 세상으로 날아가기 위해 비상의 훈련을 하는 우둠지가 되리라는 것을.
 
그네는 점토빛 둥지를 향하여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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