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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캐나다이민과 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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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재민 작성일17-11-10 05:01 조회18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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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이민과
 직장생활

 

방송통신대학졸업반에서 3과목이 빵구가 났다이민신청하고 영주권이 나온지도 1년이 다되어 가고 있는 95 3  방송대학 졸업은 포기하고 이민을 떠났다경제적 어려움이 많아 몇달의 렌트비만을 가지고 떠나는 미지의 세계 ,다른 사람들은 현장답사 갔다 온다고 이민할 곳을 갔다 왔다지만  그냥 떠났다항공정비를 하면서 공군을 제대했지만 비행기 한번타본적이 없는 시골 촌놈이 서울에 상경해서 살다가 이젠 해외로 나가는 것이다김포공항이야 공항앞 호텔에서 일했으니익숙했고 쌍둥이 아이들 둘을 데리고 떠난 비행기에서 아직 분유를 먹는  아이들의 분유를 타기위해 스튜어디스에게 따뜻한 물을 부탁하다 나중엔 스테이션에 가서 내가 직접가져 오기도 했다아이들이 칭얼대고 울어서   없이 둘을 엊갈리게 의자 2개에 누이고 나와 옆지기는 서서 오는 시간이  많았다.바닥에 앉기도 하면서

 

 밴쿠버공항에 도착해 보니 김포공항보다도 아주 작은 공항에 낮설기만한 공기가 느껴졌다 주소가 없다는 이유로 공항검색대에서 걸려서 말도  통하지 않아 오랜 실랑이를 하다가 랜딩써비스를 하기로  분의 전화 연결을 하고 그 사람말과내가 모텔을  거라는 말과 일치하니 내보내 줬다아이들은 그사이 더 지쳐서 축쳐져 있었고 공항밖으로 나와서 랜딩써비스 회사 사무실에 먼저 가서  쵸코비스켓인가를 먹고 공항을 빠져 나오는 길은 정말이지 한가하기 이를데 없었다일요일이라지만 이렇게 차가 없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정도로… 그리고 킹스웨이에 있는 2400모텔에 도착했다아이들하고 지내라고 2베드모텔을 구했다는데 하루 120불이 넘는 거액의 모텔비에 캐나다 물가 정말 비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그리고다음날 부터 소셜넘버 신청하고 노스밴쿠버에 캐필라노 댐구경시켜주고 리치몬드에서 정착하고 싶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써리나 코퀴틀람에 많이 정착을 한다고 알려 주었지만 차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는데 시장보기 좋고 버스가 다니고 다운타운까지 쉽게   있는 곳으로 리치몬드를 택했다.

 

 그리고 이민가서 좀 더 편하자고 한달전에 미리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아  이웃에 한국분들이 밥상등을 빌려 줘서 난민같은이민생활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는 아파트가 넓다고 신나게 뛰어 다녔다사실은 아래층에  모찌를 사들고 가서 우리 아이들이 뛸지 모르니 이해해 달라고 하고 갔는데 아랫층엔 아이들이 7명이나 되었고 그집이  시끄러운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짐이 늦게와서 이사짐회사이자 랜딩써비스 회사의 분과 다른집  짐을 내리고 저녁늦게 우리짐을 내리고 나서 12시가 넘어 후불로 내기로한 이삿짐비용을    없다고 항의 하고 한국 이삿짐회사에 전화하고이민 첫번째 부터 속은 느낌에 아주 분해하던 그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영어학교를 다니면서 학생이 되었다는 느낌은 좋았지만 100통이 넘게 보낸 이력서엔 답이 없기도 했고 답이 있다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이력서 복사하고 이력서 보내려고 자주 들리다 보니 간이 우체국 주인아저씨 아줌마와도 친해질 정도였다이력서도 영어 선생님의 교정을 받아서 제대로 썼지만 일자리를 얻을  없었다취업이민오면 취업이 바로 될줄 알았는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렌트비도 다음달에 내고 나면 생활비가 걱정인 상황에서 한국에서 친구가 이민을 왔다그는 혼자인데 스위스그랜드에서 같이 근무하던 친구,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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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mond님의 댓글

Richmond 작성일

될 즈음에 "나 취직되서 나간다."고 했다. 부러웠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우리 사장이 너 좀 보재”하는 친구의 말과  술이나 한잔하자는 사장의 전화에 선뜻 나섰다. 리치몬드에서 브로드웨이까지 가려면 30분마다 한대씩 있는 버스를 타고 브로드웨이와 그랜빌에서 또 30분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킹스웨이와 만나는  킹스웨이 게이트에서 내려야 했는데 집에서 나온 시간이랑 도착한 시간을 따지면2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도착해서 술한잔하고는 친구소개라서 믿는다면서  주중엔 영어학교 끝나고 저녁시간에  일하고 주말에 학교 안갈땐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직원처럼 일하기로 하고 시간당14불을 받기로 했다. 렌트비도 걱정이 되는 상황에서 일단 안심이 되었다. 영어학교가 끝나자 마자 일하러 가고 저녁엔 자정이 넘어서 올때가 많았는데 1시넘어서 버스가 없을땐 사장님이 데려다 주기도 하고 양아저씨가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한국에선 특급호텔에서 일했지만 여기선 새로 배워야 한다면서 김치절이는 것 배우라고 해서 도와 주고 국수 반죽해서 국수 뽑는 일, 그리고 재료 써는 일등을 했다. 두리아빠가 주방장이었고 양아저씨 나 그리고 조사장님 누나 그리고 다른 밥하는 아줌마가 함께 일하던 브로드웨이 신라회관. 지금은 식당이 없어져서 어딘지 자리도 한참을 찾아야 하지만 내 이민 생활 시작을 가능하게 해준 고마운 조사장님이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선상의 다른 한국식당인 원조서울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8시간만 일하는 조건으로 일을 하게된다. 월급은 2000불로 당시에 게스비가 35센트하고 우유 3.8리터 한병에 1불하던 때이니 괜찮은 조건이었다. 물론 식당일이 힘든거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순수했던 당시는 정말 재미있었다. 물론 양념을 티스푼으로 얼마를 넣으라던지 날마다 먹을 수 있는 직원식사는 뻔한데 특별한거 먹자고 투정하는 사장님이 좀 야속하기도 했다. 한국정육점에서 고기를 납품했는데 가끔씩 질떨어지는 LA갈비를 한박스씩 주면 그걸로 김치넣어 끓이기도 하고 다른 재료 넣기도 해서 점심을 해결하거나 고기 손질하고 남는 찌끄래기를 넣어 된장국을 끓이기도 하는게 직원식사였는데 그것도 먹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손님 음식만드느라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엔 구사장님과 고사장님이 동업하다가 구사장님이 영동회관을 한다고 나가면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같이 가지 않았고 몇달후에 영동회관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나중에 구사장님이 만나서 하는 말이 전주방장이 같이 안가서 그랬다고 원망 어린 말을 했다.

 당시만 해도 브로드웨이 킹스웨이가 한인들의 중심이었고 로얄서울관 아리랑이 다 그주변에 있었다. 역시 킹스웨이에 있는 웨스턴마켓에서 매주  빌려오던 드라마 테이프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더불어 한국신문에 한국기사를 보는 것으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다. 중식을 맡았던 설아저씨 우리가 늘 별명으로 부르던 일식담당 미스터 안.(나중에 밴프에 서울옥으로 가고나서 소식이 끊김)그러던 어느날 한국신문에 기내식회사에서 구인한다는 광고를 봤다면서 지원해 보라는 설아저씨말에 지원을 하고 합격이 되어 공항앞에 기내식회사에 일하게 된다. 물론 밴쿠버 선이나 프로빈스를 늘 챙겨서 구인난을 날마다 훓읽고 이력서도 꾸준히 냈지만 아는 사람이 없으면 취직하기 쉽지 않다는걸 느끼게 되었다. 기내식회사에 입사하면서 쿡이라고 해서 월급만 조정해서 17불을 받고 들어 갔는데 쿡핼퍼로 찍혀 나온 월급명세서보고 총주방장한테  주방장이던 사람을 쿡핼퍼가 말이 되냐고 따지니 프로베이션기간만 그런거라면서 그렇게 시작한 기내식회사에서 난 싱가폴항공과 에어캐나다, 에어 차이나를 주로 담당했고 싱가폴항공의 한국음식 레스피를 만들어 주방장에게 제공했다. 그런 이유로 날 채용했다는 걸 알았지만 회의에 참석해 영어를 알아 들을 수 없어서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오버타임을 했는데도 오버타임을 지불하지 않아서 따지니 오버타임하라고 했냐는 수셉의 말에 서럽고 억울해서 눈물이 글썽여 지기도 했던 시절. 사내에서 교육하고 바로 시험보는 경우도 많았는데 듣기 시험이 아니라 교육받고 바로 필기 시험을 보는 거라 최고 성적을 받아 총주방장이 칭찬 할땐 기분이 좋았다. 비빔밥이나 잡채밥을 만들어서 기내식에 제공하자고 했지만 그릇도 바꿔야 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바꾸지 못하고 있던차에 대한항공에서 비빔밥으로 히트를 쳤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뭐하나 경영진에서 실행을 안하는데... 밴쿠버 컴뮤니티 칼리지에서 조리장시험을 보기위해 도제제도를 시작하고 2년차에 그만두고 만건 총주방장이 바뀌어서 새로온 중국인 주방장이 계속할 수 없게 해서였다. 여기 사인만 해달라고 서류를 가져 갔는데 대답은 단호했다. "노." 그후론 기회가 더욱 멀어졌고, 여러가지 일도 많고 사건도 많았지만 지금의 기내식회사보다는 낭만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독일출신 주방장 마이클 한스는 늘 직원들에게 독화살을 쏟아 붇듯이 주의를 주었고 여자직원들은 화장실가서 울다와서 얼굴이 퉁퉁붓기가 예사였다. 나도 하도 옆에서 잔소리를 해서 한번은 반항한적이 있고 그가 다른 직원도 있는데 그러면 되겠냐고 조용한 방으로 불러서 너가 꼭 나 젊어서 성격하고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4년이 지난 어느날 에드몬튼에서 한국식당을 인수하신분의 구인광고를 보고 연결이 되어 그리로 가게 되었는데 회사에서는 내가 떠난다고 킹스웨이 이학부페식당에서 송별회까지 해주었다. 에드몬튼식당은 원래 양식당이었던걸 인수 해서 한식당으로 오픈한 것으로 오픈준비를 하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사람을 뽑는건 염려 말라더니 모두 아줌마들로 채웠고 말이 주방장이지 힘든 일이나 음식만드는건 다 내가 해야 했다. 양식당을 한식당으로 바꿨으니 자리도 안잡혔고 에드몬튼이 한국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공단안에 있는 식당이라 몫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해서 매출이 부진하니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식을 하는 것도 사장님 타운하우스에 함께 지내는게 불편한 것도 있었고 전에 다니던 회사에 대한 향수도 있어서 다시 밴쿠버로 돌아 오게 된다. 그 사이에 나 대신 한국직원 하나를 뽑았는데 꽤부리고 어영부영한다고 같이 일하던 동료가 돌아오면 좋겠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서 일하게 되고 9.11사태가 벌어 지기 전까지는 평생을 일할 직장이라 생각하고 몰게지로 산 아파트가 있는 리치몬드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5천불을 다운페이하고 산 아파트 그런데 사고 나니 세금도 내야하고 이거저거 낼거 있어서 5천을 더 몰게지로 얻어서 산 아파트. 옆지기는 늘 좁다고  불평하고 2층이라 시끄럽다고 불평해서 기회가 된다면 팔고 다른걸 사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9.11이 터지고 직원50%가 회사를 떠나게 되었는데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가게된 곳이 오픈초기였던 한아름마트. 이때 치매로 늘 산을 헤메고 동네사람들이 찾아 나서던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카드로 비행기표를 사서 한국을 가게 되는되 돈도 없이 아버지 장례식에 왔다고 엄마가 한소리하고 아픈데 아버지상당했다고 한국간다고 갔다와서도 옆지기가 계속 이야기한다. 한아름마트에 일하기로 한것도 2주 미루고 갔다온 한국은 이미 장례식을 치른후라 사모제만 지내고 심한 감기몸살로 앓다가 밴쿠버에 돌아 온다. 한아름마트에서 맛사랑을 오픈하면서 그곳에서 반찬과 캐터링 김치등을 담당하는 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일을 하는데 사장이 얼마나 쪼이던지. 회의때마다 매출이 작다고 조여왔다. 오뎅탕, 닭튀김등을 만들어 반응이 아주 좋았지만 그런것으로 매출을 높이기엔 문제가 있었다. 캐터링도 광고를 많이 하고 알려져야 하는데 그것도 흐지부지… 해서 캐나다 공군 조리병으로 지원해서  필기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한국 학교 경력까지 번역해서 제출하고 면접을 봤다.옆지기가 이라크파병하려고 보내려 하는것이라 극구 말렸다. 나이 40에 군대 간다는게 꺼름직하기도 해서 포기하고 프린스조지로 갔는데 나중에 옆지기가 그곳으로도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날마다 족발 삶고 김치소스 만들어 내도 매출에 영향이 미칠 수 없다는걸 느끼고 프린스조지에 그레이헌드 버스 데폿에서 식당을 하기로 하고 한남2층에 건강식품점에서 냉동고도 하나 사서 트럭에 싣는데 한아름 직원들이 대여섯이 와서 들어도 꿈쩍을 안해서 결국 이삿짐회사에서 와서 싫어 주는 것만 하게된다. 그레이헌드 버스는 밤늦게 도착하기도 하고 새벽에 출발하기도 하는데 그걸 다 맞춰서 오픈을 해야한다. 낮엔 버스가 없으니 손님이 없다.  Billabong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이 빨리 먹고 떠나야 하는 버스정류장 식당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직원을 둘을 써서 오후에 맡기고 낮엔 내가 열었다가 나중엔 팀홀튼이 오픈하고 맥도널에서 햄버거사서 우리 식당에서 펼쳐 놓고 먹는 손님아닌 손님도 늘고 스케줄이 변경되면서 손님이 줄기 시작해 직원들을 다 자르고 나혼자 시장보고 케셔하고 요리하고 모든걸 했다. 동양사람들이 식당을 하니 시비거는 사람들이 많았고 너는 아시안갱 난 백인갱 싸워볼래 하는 놈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구타를 당해 학교가서 따지니 교감이 어쩔수 없다는 투였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고 경찰은 학교에서 알아서 할일이라고 하고 하여 아이들을 크리스찬 스쿨에 보내려하다가 밴쿠버로 내려보내게 된다. 옆지기가 밴쿠버로 1년만에 돌아간 아이들을 돌보느라 보름씩 밴쿠버와 프린스 조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래선 생활이 안되겠다 싶어 식당을 매각하고 내려 올땐 마지막에 인벤토리를 인수 안하겠다는 인수자때문에 한국교회에 팔 수있는 물건은 팔고 가져 내려 올건 미니밴으로 3번에 걸쳐서 가져 내려 왔다.

 뒹굴 거리면서 다시 취직하긴 싫고 적당한 비지니스를 찾다가 크로버데일에 독일델리숍 컨추리 델리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직원들은 서양백인3명을 쓰다보니 바빠서 줄이 길게 늘어 섰어도 남는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직원들을 자르고 내가 직접하려고 하니 손님들중엔 내가 동양인이라서 나에게 써비스 받는걸 거부하는 손님도 있고 나이 들어 사망한 단골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은행에서 담보대출받아 생활하는 것도 힘들어 내가 취직을 해서 낮엔 가게에서 일하고 저녁엔 카지노에서 일하는 생활이 시작된다. 코퀴틀람 빌라버드카지노 중식당으로 일하게 되었던건 총주방장이 날 잘 본 것 때문이 아닐까싶다. 중식을 전혀 모르다시피한 상황에서 그냥 밀어 넣다시피하고 배워가면서 일하게된 직장. 아직은 가게가 더 걱정이었던 그시절 .이때쯤에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전갈을 받고도 가지 못한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도 가지 못하고 옆지기만 다녀오는 상황이 되어 버린 그때.

가게를 정리하고  아파트를 팔고 렌트로 옮기고 나서 멀리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2달만 일해보고 다시 복귀한다고 했더니 총주방장이 허락을 하지 않아 사표를 내고 간 곳이 레이크루이스 페어몬트호텔. 관광할땐 화려한 호텔같이 보였지만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음식만들어 이동하는 동선도 길고 세계 40개국이상에서 온 직원들간에 불협화음도 많았다. 그곳을 그만두고 집으로 와서 다시 사스케치완 화이트 우드로 가서 주유소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체감온도 영하50도 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백인직원들뿐인 식당에서 매니저로 취직해서 간 그곳에서 주방에 갇혀서 주방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방직원들이 아프다고 안나오면 쉬다가도 나가야 하고 모텔방에 잘때 바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뻔히 보이는 주유소와 모텔의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지는건 살을 에이는 바람이 얼굴을 따끔거리게 만들어서 일것이다.
결국 그곳에서도 그만두고 다시 밴쿠버로 오는 그레이헌드에 몸을 싣고 안개자욱한 아침같은 길에 홀로 걷고 있는듯한 나를 본다.

 밴쿠버에 돌아와서 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가 구세군다운타운센터에서 일하는데 한번 오라고 한게 생각나서 찾아가고 그길로 취직이 되어 일하게 된다. 구세군은 주정부와 밴쿠버시가 연방정부와 더불어 펀드로 하는 사업의 일환인 부랑자 숙소와 부랑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처음에 일을 시작할땐 캐주얼로 시작해서 파트타임 풀타임이 됐다. 필리핀인인 친구가 매니저라 필리핀 직원이 많았고 인도출신 수퍼바이저와 필리핀출신 직원들은 사사건건 나를 걸고 넘어졌다.인도출신은 필리핀출신 매니저 친구라서 필리핀출신은 같은 필리핀출신이 아닌 나에게 친구가 잘해주는게 샘이 나서 그런듯 하다. 공무원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직장이기도 해서 베네핏도 좋고 그렇게 힘든 일도 없어 좋았지만 매니저인 친구를 권고 사직시키고 백인 매니저를 대신 일시키면서 셀러리도 훨씬 더많이 주고 일은 하나도 안하는 것에 열받고 파트타임 수퍼바이저자리도  결국 내가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만두고 지금의 Dan D Food에 주방장으로 일하게 된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더 나은 직장 찾기가 이젠 나이가 먹어서 쉽지가 않다. 요즘은 특히 상위 매니저 이상의 잡은 백인들이 유리천장을 만들어 유색인종의 진입을 막고 몸쓰는 막일도 인도사람과 필리핀사람들이 자기들의 천국을 만들어 다른 민족이 취직해서 들어가면 견디지 못하게 괴롭힌다. 자기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다른 민족이 버티지 못하게 하는 직장들이 많아 지고 있다. 팀홀튼은 필리핀사람들이 매니저까지 장악하는 곳이 많고 우체국은 인도사람들이 많이 장악해 가고 있다. 기내식 회사도 총주방장이 인도사람이라 인도인들이 주류로 형성되고 있다. 이민초에 백인들이 경영을 할땐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일을 시작하기도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캐나다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을 잡기가 힘든 악순환의 역속이었던 것이다.필리핀 사람들은 2개 3개 잡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풀타임 2개에 파트타임 하나. 사는게 아니라 일에 치여 잠도 못자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에겐 취미활동이 없다. 거기에 비교하면 호사를 하는 셈이다.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는 삶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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