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제일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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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8-23 16:37 조회1,5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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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강산
1982년 봄, 7년 동안의 직장생활 대한항공을 그만두고 독립해서 사업을 해보겠다고 의기를 다지던 때이다. 마지막 군 생활을 했던 가평에서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걷기 시작해서 의암댐을 거쳐 춘천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소양강댐까지 갔다. 소양강을 가로막은 거대한 댐이 눈앞을 가로막고 우뚝 서서 남아의 호연지기를 북돋아 주었다. 배를 타고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 양구까지 가서 원통 한계리에서 다시 하룻밤을 잤다. 한계리에서 한계령을 타고 넘어 오색까지 걸어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내가 살고 있다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색에서 감자전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붉은 색이 감도는 오색약수 한 잔을 길게 들이마시고 무거운 다리를 끌고 길을 나섰다. 내리막길이니 힘은 덜 들었지만 여러 날의 도보여행으로 여독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오직 동해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으로 피곤한 다리를 재촉했다. 마침내 양양을 거쳐 낙산사 의상대에 도착했다. 한 눈에 펼쳐지는 짙고 푸른 광대한 바다가 갑자기 눈앞에 끝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아! 내가 설악을 넘어 동해에 다달았구나. 아름다운 이 강산, 내가 죽도록 살다가 잊지 못할 땅과 바다여라!’
다시 양양에서 한 밤을 보내고 주문진을 지나 강릉 경포대까지 걸었다. 선교장 앞길로 해서 경포호수를 오른 편에 두고 경포대를 올랐다. 걸음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경포대에 올라가는 순간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第一江山」이라고 적힌 현판이었다.
네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의 조국이요, 우리의 강토인 제일강산이라고 힘차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조국, 나의 어머니가 제일이다. 제일 속에는 애정과 긍지와 자랑이 함께 숨 쉬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태어나서 살아온 이 강산이 제일이라면 당연히 잘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의거 후에 여순 감옥에 있을 때 여러 유묵을 남겼는데 순국 얼마 전에 쓴 글씨가 바로 「第一江山」이었다. 오늘 안의사의 깊은 뜻을 모두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조국 강토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담아서 이 네 글자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비록 떠나더라도 조국에 남은 동포들은 제일가는 이 강산을 꼭 보존해 주시오’라는 애끓는 부탁과 염원을 담았다고 여겨진다.
경포대에 걸려 있는 제일강산은 물론 안의사의 글씨와는 다르다. 글씨가 다르다고 의미가 다를 수야 있겠는가.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치가 수려하기로 예로부터 유명한 이곳에 걸릴 만한 현판이 아닐 수 없다.
경포대는 고려 말 1326년에 건립되어 그 동안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잡던 곳이다. 일설에는 조선 태조와 세조가 찾아왔고, 오죽헌에 머물던 율곡이 10살 때 이곳에 와서 「경포대부」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정철은 그가 지은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 중에 제일이라고 경탄하였다.
경포대에서는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뜬 달과 호수에 비치는 달, 바다 위에 떠 있는 달, 님과 함께 마시는 술잔에 뜬 달, 님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달이라고 하였다.
경포대에서는 바다와 호수와 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승이니 어찌 여기서 제일강산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싶다.
우리 강산 좋을시고
제일이라 제일강산
산 좋고 물 좋으니
사람 살기 제일 일세
세상천지 어느 메에
이만한 곳 있을 손가
삼천리라 금수강산
사시사철 살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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