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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시간] 우리는 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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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6-15 02:45 조회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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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한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이제 네 번째 해를 보낸다. 결혼을 위한 형식을 여행 하나로 끝내버릴 만큼 아무 의식도 치르지 않았던 우리. 반지도 제대로 된 사진도 없이 관악구청에 걸어가 혼인신고 한 날이 결혼기념일이 되었다. 그때는 남들 하는 거 똑같이 하고 싶지 않다는 어떤 고집이 있었다. 부모님들은 아쉬워했지만 마흔이 넘어서하는 결혼에 우리가 온전한 주체이고 싶었다. 


여행에서 처음 만나 여행으로 연애하고 각자의 나라로 헤어질 때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같은 나라에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와 수고를 함께 지불하고 필리핀, 한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했다. 제임스는 내가 만난 누구보다도 내 안의 진가를 가장 빨리 알아본 사람이다. 지금 보면 그의 신중한 기질과 완전 반대인 모습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신비롭다. 동성과 이성 중 호감이 생기는 사람을 만나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지는데, 그를 스쳐 지나갈 사람이라 생각해 오히려 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안목으로 평생 가장 훌륭한 선택을 한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나로 인해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도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 몰랐을 것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아끼는 법을 배웠다. 인내하고 기다리고 표현하는 풍성한 사랑. 아주 가끔 내면 깊은 곳의 어두움이 튀어나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 나는 그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고 있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다. 좋은 사람 정체성을 준 그에게 고마운 건 그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나 자신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서이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 그로부터 확인하는 작업은 굳이 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서로를 알아가서 그런지 우린 꽤 잘 맞는 여행 메이트이다. 매년 혼인서약일이 되면 처음처럼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여행 중 우선순위가 비슷하고 선택에 마음이 맞는다. 배를 타고 온 밴쿠버섬을 나란히 누비며 우리의 만남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떠올렸다. 한 사람을 신뢰하고 신뢰받기 위해 겹겹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가는 시간. 여전히 그를 온전히 신뢰하고자 기도하고 나의 초라함에 그의 관용을 구하는 과정 중이다. 


긴 인생 제임스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주 생각한다. 우리 둘만 사는 삶은 정신을 홀딱 빼놓는 일도 별로 없고, 의사결정이 둘에게만 맞추어져 자유롭고 조금은 단조로운 삶이다. 그래서 여행은 처음 마음을 꺼내보고 우리의 삶을 축제로 만드는 시간이다. 새로운 길을 걷는 걸 좋아하고 푸른 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설레어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제임스의 모습이다. 여행으로 서로의 좋은 점을 계속 알아보고 서로의 곁을 지키자는 다짐을 한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서로에게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를 뺀 세상은 바쁘고 복잡하게 흘러가 가끔 우리가 섬처럼 느껴지지만 누군가 가끔 놀러 오고 싶은 섬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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