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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봄이 오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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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숙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3-23 17:46 조회1,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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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db74957aec59f1bf4b13c8b60992ef_1570041776_105.jpg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밖에는 봄비가 소근거린다. 눈이 침침하여 스탠드를 밝히고 씨감자를 쪼개다가 창문을 열었다. 희미한 전광으로 세류 같은 빗줄기가 뿌우연하다. 봄비는 처녀비다. 수줍은 듯 조그맣고 고운 목소리로, 보드라운 손길로 가만가만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구석구석 찾아 다니고 있다. 가장 작은 풀씨까지 빼놓지 않고 먼 강남의 밀 향기 같은 봄소식을 전해준다. 


오늘 낮에 텃밭에 춘채春菜씨를 넣었다. 삽질을 하다 보니 주먹만 한 돌멩이가 발 밑으로 날아와서 손으로 집으려다 깜짝 놀랐다. 그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몰캉하게 잡히는 개구리였다.


우수 경칩이 지난 지도 꽤 여러 날 되었건마는 겁 많은 개구리는 아직도 흙을 뒤집어쓰고 늦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발기진 개구리는 꾸무럭 꾸무럭 선잠을 터는지 뒷다리를 자맥질하듯 흔들어 댄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불거진 눈과 꾹 다물린 입이 왕개구리만치 크고 의젓하다. 이제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는 생존을 위하여 도약의 자세를 취할 것이다.


후덥지근한 목장갑을 벗어 놓고 흙덩이를 부수었다. 맨 살에 와 닿는 흙의 촉감은 신선하고 만만하다. 흙이 안고 있는 생명 탓인가. 이상한 활력이 용틀임을 한다. 골을 타고 상추랑 시금치, 아욱, 쑥갓 씨를 뿌리고 다독이는 손끝에 아지랑이처럼 묻어나는 3월의 양광, 눈 두는 곳마다 찬란한 봄 빛깔이다.


누가 뭐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을 계속한다. 눈깜짝할 사이에 핵무기 하나로 온 세계가 파멸한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들은 체 만 체 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분만한다. 이것이 진실이며 하늘의 뜻이다. 사과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봄 처녀를 허밍으로 불러본다. 편안하고 행복하다. 가진 것 없어도 가득한 마음의 평화는 긍정의 빛깔 고운 생활을 피어나게 한다. 누가 씨 뿌리는 자의 소망을 알고 그들의 인종을 알며 고독한 일상을 아는가.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웬만한 추위는 마주 잡은 손길로 녹여온 농촌이지만 근래의 추위는 속수무책이었다. 사람들은 따뜻한 햇살이 그리워 양지를 찾으며 목마르게 봄이 오기를 기다려 왔다.


정월 대보름 싸한 바람 속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그 속에 간간이 들려오는 봄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급히 들로 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려온 봄이기에 이 봄이 더욱 찬란한 것이리라. 농부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있다. 우리도 사과나무를 전정剪定하고 구덩이를 파서 두엄을 주어야 한다.


이제 어둑신한 토광에서 겨울을 난 씨오쟁이를 꺼내다가 실한 곡식을 종자로 골라 놓고 못자리 논으로 나가야 한다. 비닐 보온 못자리 안에서 신품종 볍씨는 다수확의 새싹을 틔우고 있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할수록 물 대기에 신경을 써야 동해를 입지 않는 건강한 모를 기를 수 있는 것이다.


봄이 오는 과수원에 서면 나는 이상스레 코끝이 찡해오는 감동에 젖는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부활의 의미여서일까. 앉은 자리에서 눈을 돌리면서 축사 뒤의 응달에서도, 돌 틈에서도 하모니카를 불어 대며 새싹이 돋고 있다. 가만히 마음의 귀를 열어 놓으면 옹달샘에 새 물이 솟 듯 솟아나는 생명의 찬가.


지난 겨울 물러 설 줄 모르는 혹한 속에서 혹시라도 어린 뿌리가 동사하지 않을까 조바심 치며 짚으로 싸매주고 덮어준 지성이 나무에 닿았는지 유목幼木은 모두 살아나서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아직은 한 그루에 스무 남은 송이쯤 달려 있는 꽃이지만 대견하기가 그지없다. 여기 피어나는 사과 꽃은 꽃이라 기보다 우리의 삶의 의지요, 소망이며, 기원이다. 봄은 위대한 창조자. 끝내 운명해 버리고 말 것 같은 침묵의 대지 위에 오묘한 생명의 신비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소생의 원리, 언 것은 녹이고 갇힌 것은 풀어주며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그 멀고 먼 겨울의 터널을 지나 예까지 와 준 새봄을 새봄으로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쓰잘 데 없는 탐욕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사랑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리고 봄볕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주변을 어루만지고 내가 누군가에게 돌아갈 햇볕을 도시의 거대한 빌딩처럼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오후에는 밭 둘레에 호박씨와 옥수수씨도 심었다.


여름방학이 오면 천둥벌거숭이가 되고 싶어 도시의 먼지를 흠빡 쓰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위해 나는 가마솥에 감자를 옥수수를 쪄내고 멍석가에 벌어지는 여름 밤의 축제를 위하여 오선지 가득 모정의 소야곡을 그릴 것이다. 아직도 비는 속삭이듯 내리고 있다. 낮에 뿌린 씨앗들이 달착지근하고 녹록한 봄비를 마시고 기지개를 켤 게다.


내일은 새벽 일찍 창문을 열어놓고 봄의 왈츠를 볼륨 높여 놓은 채 밭에 나가서 감자씨를 넣어야겠다. 그리고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집안을 채우거든 우리들의 근사한 출발을 위하여 햇쑥 애탕국에 달래 무침을 차려 달콤한 사과주로 건배를 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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